데일리스포츠한국 이석희 기자] 광주광역시는 오는 27일 오후 빛고을시민문화관 다목적실에서 ‘광주 민주역사 자원 발굴 및 활용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한다.이번 토론회는 광주3·1운동, 광주3·15의거, 광주4‧19혁명 역사를 중심으로 인물과 현장 등 자원 발굴과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이날 토론회에서는 사건별 민주역사 자원을 발굴하고 정책 활용 계획을 수립하는 등 심도있는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토론회 좌장은 역사학자인 신주백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맡아 광주3·1운동, 광주3‧15의거, 광주4‧19혁명 등 역사분야 주제발
[데일리스포츠한국 이석희 기자] 광주광역시는 15일 금남로공원 광장에서 ‘제64주년 광주3‧15의거 기념식’을 개최했다.이날 기념식은 광주3‧15의거 주역, 3‧15 및 4‧19단체 회원, 지역 기관단체장과 시민 등 1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록영상 상영, 선언문 낭독, 유공자 표창, 기념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광주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의해 일어난 시위다. 자유‧민주‧정의를 위해 싸웠던 우리나라 최초 민주화운동으로 4‧19혁명의 기폭제가
우리나라는 이른바 ‘87년체제’를 골격으로 운영된다. 1987년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타협으로 1987년 제9차 개헌인 현행헌법이 마련되었다. 이로부터 35년이 지났다. 그동안 정치적으로는 8명의 직선대통령, 네 차례의 여야정권교체가 이뤄지고, 경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가에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과도기적으로 마련된 헌법을 개정해야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변화된 국가적 위상에 걸맞지 않은 조항도 적지 않다. 우선 헌법 전문의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로잡고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 촛불정신을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ㆍ4.19혁명ㆍ부마항쟁ㆍ광주민주화운동이 그렇듯이 6월항쟁도 역시 주역은 이름없는 민중이었다. 지도층은 외세에 굴종하거나 기득권력에 빌붙어 사회개혁을 거부하거나 외면했다.그해 6월 민주항쟁의 과정에서 민중은 스스로 노래를 짓고 함께 부르면서 반독재 저항에 나섰다. 작사ㆍ작곡자가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는 것도 많다. 그때 어떤 노래가 불려졌는지 알아보자. -투사의 유언-한평생 후회없이 싸우다 간다못다한 일들은 가슴에 품고나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하랴또 다시 투사가 되어 투사가 되어한 평생 후회없이 싸우다 가리내
35년 전인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경, 서울에서는 전혀 상치되는 두 개의 큰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려 전두환 대통령이 육사동기인 노태우의 손을 높이 들어주었다. 민정당 대통령후보에 선출된 노태우는 울먹이면서 전두환의 ‘배려’에 감격해했다.같은 시각, 서울중구 태평로 대한성공회에서는 야권의 연합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축하와 감격의 꽃다발이 오가고, 다른 쪽에서는
대통령 취임식과 국회의 장관후보자 청문회, 각 정당의 지자체 후보 선정 등 주요 정치 행사가 겹치면서 놓친 일이 있었다. 지난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우여곡절 끝에 2018년 11월 법정기념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네 번째 맞는 기념일이었다.5월 11일은 128년 전 전봉준ㆍ김개남 등 동학농민군이 반봉건ㆍ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정읍시 황토현에서 부패 무능한 관군을 상대로 첫 대승을 이룬 날이다. 이날의 정신은 이후 우리 근현대사에서 저항과 변혁
윤석열 당선자는 이같은 양극화된 국민의 정서를 안고 승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두 어깨에는 코로나 극복, 한반도의 평화유지, 지구온난화, 지구적 신냉전, 청년실업 등 많은 과제가 얹혀있다. 선거 과정에서 수많은 공약을 제시하여 기대치도 높다. 민주주의 기본가치와 틀을 지키면서 국민통합의 길을 찾아야 한다. “국가의 배를 조타하는 예술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어려운 예술이다.”독일 철학자 랑캐의 말이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선장이 결정되었다. 상대 후보와의 표 차이가 불과 0.73% 포인트(24만 700여 표)였다. 단
우리 역사에는 시대마다 걸출한 개혁주도 인물이 나타났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 개혁주도 인물이 성공하였다면 우리 역사의 전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들 개혁주도자들은 그때마다 부패무능한 국정의 개혁과 만민평등을 주창하고 대외적인 민족자주성의 확립과 혁신정치를 시도하였다.그러나 개혁주도 인물들은 대부분이 보수기득세력의 두꺼운 장벽을 넘지 못하거나 외세의 개입으로 그 시도가 좌절되고 말았다. 우리 국민성 역시 전통적으로 보수와 개혁의 두 흐름으로 교직된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혈통을 갖고 있는 한민족은 원시 고대사회의 기마민족적
높은 자리는 그 위치에 걸맞는 책임과 도덕성 그리고 정의의 실현이 요구된다. 절대군주 시대에도 가뭄이 들면 임금이 하늘에 부덕함을 빌면서 기우제를 지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위정자와 특권층은 권력만 행사했지 책임감과 도덕성ㆍ정의구현을 외면했다. 결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쳤다. 이를 지켜본 백성들이 몰려가 임금의 거처 경복궁을 불질렀다.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왜적과 싸운 장수들은 제쳐두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관직과 훈작을 나눠주었다. 뒤를 이은 인조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고 태평양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우리나라는 해양세력 대 대륙세력, 유교문화권 대 기독교문화권, 자본주의세력 대 공산주의세력의 대척지대가 되었다. 그래서 늘 주변 열강으로부터 침략과 분단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중국은 한반도가 자국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망치로’, 일본은 ‘자신들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로’, 미국은 ‘동북아의 전진 기지로’, 러시아는 ‘자국의 팽창에 분리될 수 없는 행동반경으로’ 각각 인식하면서 결코 영향력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식자(지식인ㆍ선비)가 갖춰야할 기본 소양으로 문(文)ㆍ사(史)ㆍ철(哲)을 들었다. 문학에서 마음을 도야하고 사학에서 과거의 행동을 거울삼아 철학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詩)ㆍ서(書)ㆍ화(畵)를 추가하였다. 수준과 정도의 문제이겠지만, 한 사람이 이와 같은 학문과 예술의 소양을 두루 갖추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을 것이다.선현들이 사(史)를 중시한 데는 까닭이 있다.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를 기록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잘하고 잘못된 점을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 교훈으로 삼고자 함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언론에서는 여전히 ‘대권후보’ ‘대권주자’ ‘대권경쟁’ 등 결코 써서는 안 되는 용어가 남용되고 있다. 여기서 대권(大權)이란 대통령 또는 대통령의 권한과 권능을 말한다. 삼권분립이 제도화된 우리나라에서 대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6월항쟁 이후에 집권한 대통령들에게는 헌법상 대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행사할 수도 없다. 그만큼 국민의 정치의식이 성장하고 권력분립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은 헌법상의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대권’을 휘둘렀다. 특히 삼권을 귀일시킨 박정희의 유신체제
“다시는 제2, 제3의 용균이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OECD 산업재해 사망률 1위의 불명예를 벗어던져 주십시오. 산업재해를 막을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제대로 만들어주십시오.”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의 호소이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6.10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에서 무대에 오른 김씨는 헌법 제34조를 소리높여 낭독했다.기념식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세워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렸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열
“지난날의 기득권세력은 수구언론과 결탁해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 지난날 독재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왔던 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6월항쟁 20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 그로부터 12년이 되어가지만, 오늘날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2년전 촛불항쟁 과정에서 ‘기레기’란 지탄을 받았던 일부 언론은 아직도 권력기관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오늘 노 전
100년 전 3월1일 오후2시 29명의 민족대표는 서울 태화관 1실에 모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은 생략한 채 한용운이 간단한 인삿말을 했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했다. 선언서는 전국 각지에 배포됐다. ‘오등은 자에…’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했다.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으로 구성됐다.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일부 인사는 뒷일을 대비해 빠졌다.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은 “학자로 남겠다”며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들까지 합하면 독립선언에 참여한 인사는 49명이다.곧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