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거울과 하늘의 그물코

역사의 거울과 하늘의 그물코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09.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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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식자(지식인ㆍ선비)가 갖춰야할 기본 소양으로 문(文)ㆍ사(史)ㆍ철(哲)을 들었다. 문학에서 마음을 도야하고 사학에서 과거의 행동을 거울삼아 철학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詩)ㆍ서(書)ㆍ화(畵)를 추가하였다. 수준과 정도의 문제이겠지만, 한 사람이 이와 같은 학문과 예술의 소양을 두루 갖추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을 것이다.
선현들이 사(史)를 중시한 데는 까닭이 있다.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를 기록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잘하고 잘못된 점을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 교훈으로 삼고자 함이다. 그래서 사서에는 ‘거울 감(鑑) 자’ 가 많이 쓰인다. 중국의 ‘자치통감’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중요한 사서인 ‘국조보감’, ‘동국통감’, ‘동국병감’등이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려는 선현들의 뜻이 오롯이 담긴다.
서양도 다르지 않았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Historia의 의미는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란 뜻이었다. 중국인 허신(許愼)은 역사의 사(史)는 ‘사(事)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풀이, 사(史)의 뜻을 ‘바르게 기록하는 손’의 의미로 썼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염라대왕의 궁전에 걸린 정파리경(淨玻璃鏡)이란 큰 거울 앞에 선다고 한다. 이 거울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행한 선악의 소업(所業)이 빠짐없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극락과 지옥 등 각자 갈 곳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사회는 역사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큰 자리를 차지했거나(하고자) 하는 인물과 그들의 추종자들이다. 역사를 우습게 여기면서 내세우기는 ‘역사의 심판’ 운운한다. 역사를 역행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상을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는 억지다. 역사는 결코 반역사주의자들의 도피처나 변명의 면죄부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처럼 두려운 존재는 다시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죽어서 정파리경에 비치는 소업에 따라 심판을 받으면 되겠지만, 지도자들은 이와 별도로 역사의 심판이 따른다. 이를 위해서는 왕조시대의 사간격인 언론인ㆍ법조인들이 공명정직하게 기록하고 심판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 두 기관이 가장 높은 불신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그래서 역사를 우습게 여기는 부류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언론과 사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H.카는 “역사가 정확을 기한다는 것은 미덕이기 전에 하나의 신성한 의무다”라고 갈파하였다. 역사는 정확한 기술을 통해 심판과 감계(鑑戒)의 역할을 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역사의 심판’에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현대는 인지와 과학문명의 발달로 아주 짧아졌다. ‘10년 세도’도 옛말이 되었다. 그만큼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엄격한 심판관으로 우리 곁을 지켜본다. 그런데도 역사를 무시하거나 역행하면서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지도자ㆍ공인들이 꼬리를 잇는다. 그들에게 역사는 안중에 없고 당대만이 존재한다. 
노자는 ‘천지도(天之道)’에서 ‘천망론(天網論)’을 폈다.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 풀어 말하면 “천망은 하늘의 그물이니 옳고 그름을 심판한다. 촘촘하지는 못하나 결코 놓치지는 않는다”란 뜻이 담긴다.
이렇듯 선현들은 역사를 거울과 함께 그물에 비유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까지를 기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편년체 사서이다. 단재 신채호가 망명길에 나서면서 보따리에 필사한 이 책을 싸들고 갈만큼 가치 있는 책으로 ‘강목’이란 제호가 붙었다. 그는 망명지에서 이 책을 항상 곁에 두고 우리 고대사 저술에 참고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원칙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계통을 밝힐 것, 둘째,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할 것, 셋째, 시비를 바르게 내릴 것, 넷째, 충절을 높이 평할 것. 다섯째, 법제를 상세히 살필 것 등이다. 이는 역사 서술의 원칙이고 언론인들의 준칙이기도 하다.
현실이 눈멀고 역사가 귀먹어 반역사의 범인들을 놓치면 하늘의 그물 즉 천망(天網)이 기다린다. 시간이 다소 흐르더라도 하늘의 그물이 이를 놓치지 않는다. ‘천망’은 비록 촘촘하지는 않지만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인류사가 패도보다 왕도, 무력보다 평화를 지향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은 ‘천망’의 교훈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대나 정도와 개혁을 거부하면서 변칙과 악행을 자행하는 패도의 부류가 존재한다.  그들은 거대한 기득권 구조에서 한 통속이 된 이른바 기레기 언론과 사이비학자들이 변명해주고 검찰ㆍ사법의 법비(法匪)들이 덮어준다. 하지만 속임수의 기간은 길지 않고 결국 죄상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설혹, 현실의 법망에는 시효가 있어 그 죄상이 덮어지더라도 역사의 거울과 하늘의 그물코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감옥의 ‘감(監)’자가 거울에서 비롯되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누워서(臥) 철책(皿)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우리 국민은 사적인 감정은 강해도 공적인 감정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35년 동안 국권을 빼앗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일제가 패망하여 쫓겨갈 때 거의 보복이 없었다. 이승만대통령의 12년 독재가 4ㆍ19혁명으로 타도될 때 이승만은 무사하고, 박정희 18년 독재가 무너지고 국장이 치러질 때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 나와 눈물짓고, 전두환 8년의 독재가 붕괴되는 6월항쟁에도 전두환ㆍ노태우는 짧은 옥살이가 전부였다. 관용과 용서는 인간의 소중한 덕목이다. 하지만 국권을 빼앗고,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범법자는 엄중히 처벌함으로써 다시는 아류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임과 동시에 실정법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준법정신이 사회공동체를 유지하는 방책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산물인 인간은 역사의 엄숙성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엄숙성’과 관련, 찰스 비어드는 “역사 서술은 일종의 신념행위”라고 정의하였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도 공정을 기준으로 기술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기록하고 밝히는 것은 건강한 미래로 가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까뮈는 “과거의 잘못된 범죄에 대해 심판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용인하는 행위”라고 진단했다. 사가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의 교훈을 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날 수 있다.” 라고 무서운 경고를 한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일급 참모로 활약하면서 수십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다가 뒤늦게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독일 출신의 미국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단지 통계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떠벌릴 만큼 아이히만은 인간 백정이었다. 
이 사람의 재판을 참관하고 아렌트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악의 평범성’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히틀러 체제에 부역한 사람들이나 독일국민들이 그토록 엄청난 인종학살을 보고도 ‘평범’ 했느냐는 의문이었다. 아렌트는 보고서의 결론에서 “생각없이 사는 일상적인 삶이 악의 근원”이라고 진단했다. 전두환의 광주학살과 틈만 나면 사면론이 나오는 이명박ㆍ박근혜의 천문학적인 국고갈취ㆍ뇌물 등 국정농단과 관련 한국사회는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지켜보게 된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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