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 서훈해야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 서훈해야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5.19 09:14
  • 수정 2022.05.1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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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식과 국회의 장관후보자 청문회, 각 정당의 지자체 후보 선정 등 주요 정치 행사가 겹치면서 놓친 일이 있었다. 지난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우여곡절 끝에 2018년 11월 법정기념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네 번째 맞는 기념일이었다.

5월 11일은 128년 전 전봉준ㆍ김개남 등 동학농민군이 반봉건ㆍ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정읍시 황토현에서 부패 무능한 관군을 상대로 첫 대승을 이룬 날이다. 이날의 정신은 이후 우리 근현대사에서 저항과 변혁의 사상적 본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의 지도자들에게는 아직까지 국가적인 보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법 정신에 위배됨은 말할 것도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근대의 철벽에서 근대의 문을 연 횃불이고, 신분해방을 천명한 권리장전이고, 반외세의 기치를 든 주권선언이었다. 불살생, 제세안민, 왜병축출, 탐관오리 소탕의 4대강령과 노비문서소각, 문벌타파, 토지균등분배 등 12개조 폐정개혁안은 세계 어느 혁명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는 10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었지만, 목표와 지향은 다르지 않았다. 파리코뮌에 비해 53개 군현에서 실시된 집강소는 오히려 앞섰다. 1850년에 시작된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는 유사점도 있었지만, 권력의 야심에 찬 홍수전과 전봉준ㆍ김개남은 격과 결이 달랐다.

1862년 진주에서 시작하여 32년간 전국적으로 일어난 70여 건의 민란은 모두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신채호가 개탄했듯이 우리 역사는 창업ㆍ역성혁명ㆍ쿠데타ㆍ반란ㆍ반정이 있었으나 혁명은 없었는데, 민본(民本)의 주체인 농민이 마침내 봉기한 것이다. 외세의 개입으로 프랑스혁명처럼 국왕을 단두대에 올리지는 못하고 일본군과 250 대 1 수준의 무력의 차이로 숱한 희생을 치르며 진압당하고 말았지만, 동학혁명의 마그마는 이후 국권회복과 민주화의 에너지로 작동되었다.

의병→의열투쟁→3ㆍ1혁명→임시정부→의열단→광복군→분단반대→통일정부→4ㆍ19혁명→반유신투쟁→부마항쟁→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면면한 민족사의 정맥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발원한다.

세계사의 암흑기인 봉건왕조시대에 동학농민혁명이 아니었으면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등, 진보와 변혁의 가치를 모르는 저급한 종족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조롱을 받았을지 모른다. 동학농민혁명은 민본의 주체인 농민(어민ㆍ상인ㆍ광부ㆍ천민 포함)이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본사상에 따라 후천개벽에 나선 근대화의 횃불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주체가 농민ㆍ부르즈와지ㆍ쁘띠부르즈와지의 합작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은 명칭 그대로 ‘농민’이 주체였다. 농민(농업)은 옛적부터 ‘농자천하지대본’이라 내세우면서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200여년 전 호남에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용은 민란을 예견하면서 국정개혁의 ’경세유표’를 저술했는데, 뒷날 전봉준ㆍ김개남 등이 이 책을 보고 거사에 나섰다는 기록이 전한다.(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선비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말한다. “근세에는 탐묵(貪墨)이 날로 심해졌는데, 호남은 물산이 풍부하여 그 탐묵의 한없는 욕심을 메울 수 있었다. 무릇 호남에서 벼슬살이하는 자들은 백성을 마치 양이나 돼지처럼 여겨서 묵고 빼앗아 먹고, 평생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듯이 하면서, 사방에 널려 있는 밭이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썼다. 때문에 서울에서는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게 소원이다’라는 속언까지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시대적 소명이었다. 동아시아 어디를 봐도 그 시기에 농민들이 ‘강령’과 ‘개혁안’을 들고 봉기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1차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ㆍ반부패운동이었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은 척왜척양의 항일구국투쟁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전봉준ㆍ김개남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에게 아직도 독립유공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점령으로 발발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겁박하여 포로로 삼고 친일정권을 강요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면서 조선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조선이 일본에게 지배되지 않으려면 침략자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했다.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일본군과 일본군 편에 선 관군을 상대로 공주에서 최대의 전투(우금치 전투가 대표)를 치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하였다. 12월 28일 밤에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

재판이 진행될 때, 전봉준은 “일본은 곧 우리의 적국이다.”고 말하고 ‘척왜’를 봉기 이유로 댔다. 전봉준은 4월 24일 의금부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김개남은 재판도 없이 참수되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하였다. 이 법은 대한민국 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에 앞장선다고 밝히고 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는 독립유공자가 된다. 이 법률에 의거하여, 1895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명성황후 살해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한 을미의병 참여자들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전봉준ㆍ김개남 등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을 서훈해야 한다. 아울러 개헌이 실현되면 헌법 전문에 마땅히 동학혁명정신을 추가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없었다면 어떻게 3ㆍ1혁명이 가능했겠는가.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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