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인 ‘대권후보’ 용어

시대착오적인 ‘대권후보’ 용어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07.21 19:13
  • 수정 2021.09.2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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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언론에서는 여전히 ‘대권후보’ ‘대권주자’ ‘대권경쟁’ 등 결코 써서는 안 되는 용어가 남용되고 있다. 여기서 대권(大權)이란 대통령 또는 대통령의 권한과 권능을 말한다. 
삼권분립이 제도화된 우리나라에서 대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6월항쟁 이후에 집권한 대통령들에게는 헌법상 대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행사할 수도 없다. 그만큼 국민의 정치의식이 성장하고 권력분립의 제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은 헌법상의 삼권분립에도 불구하고 ‘대권’을 휘둘렀다. 특히 삼권을 귀일시킨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5공의 전두환은 그야말로 대권을 장악하고 악용하였다. 
6월항쟁 이후 역대 대통령은 그러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만 해도 자기가 임명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이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의 정신을 팽개치고 임기 중에 나와서 임명권자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손 쓸’ 길이 없다. 박근혜의 경우 국정을 농단하다가 여당(당시) 의원 56명까지 동조한 국회의 탄핵을 받고 사법부(헌재)의 전원일치 판결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대권은커녕 ‘중권’도 행사하기 어려운 것이 현행 대통령직이고 권한이다. 
첫 칼럼에 ‘대권’을 주제로 삼는 것은 이 용어가 헌법의 가치에도 부합되지 않는 반공화국적일뿐 아니라 일제가 남긴 치욕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치밀한 법률적 준비를 빼놓지 않았다. 병탄 직전인 1910년 6월 3일 각의(내각)에서 이른바 ‘합병 후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 건’을 비밀리에 결정했다. 사실상 조선통치의 책략이다. 
ㅡ.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거해 통치할 것.
ㅡ.총독은 천황에게 직속하고 조선에 대한 일체의 정무를 통할할 권한을 가질 것.
ㅡ.총독에게는 대권의 위임에 의거하여 법률 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하는 권한을 부여할 것, 단 본 명령은 별도로 법령 또는 율령 등 적당한 명칭을 붙일 것.
ㅡ.조선의 정치는 되도록 간결하게 하고 따라서 정치기관도 이런 뜻에 따라 개폐할 것.
ㅡ.총독부의 회계는 특별회계로 할 것.
ㅡ.총독부의 정무비용은 조선의 세입으로 충당함을 원칙으로 하고 당분간 일정한 금액을 정해 본국 정부에서 보충할 것.
ㅡ.철도 및 통신에 관한 예산은 총독부의 소관으로 추가할 것.
ㅡ.관세는 당분간 현행 그대로 둘 것.
ㅡ.관세 수입은 총독부의 특별회계에 속하게 할 것.
ㅡ.한국은행은 당분간 현행 조직을 바꾸지 않을 것. 
ㅡ.합병 실행에 필요한 경비는 금액을 정해 예비금에서 지출할 것.
ㅡ.총독부 및 한국 정부에 재직하는 제국 관리 중 필요 없는 자는 귀환 또는 휴직을 명령할 것.
ㅡ.한국에 있어서 관리로는 그 계급에 의거하여 가능한 한 다수의 조선인을 채용하는 방침을 채택할 것.
일제가 조선을 병합(그들의 공식용어) 하면서 굳이 ‘대권통치’를 내세운 데는 까닭이 있다. 메이지유신 때에 만든 헌법에는 나름 서구식 민주주의적 요소가 담겼다. 조선을 병탄하여 한 나라가 되었으면 똑같이 권리ㆍ의무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텍사스와 하와이를 점령하여 아메리카합중국에 편입시켜 그곳 주민들에게도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 것처럼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해서 ‘대권론’을 제시하고 조선을 초법적ㆍ무단으로 통치했다.
원래 대권(Prerogative)이란 프로이센 왕국이나 구헌법하의 일본과 같이 외견상 입헌주의를 채택한 국가에서 군주가 의회의 승인없이 행사할 수 있었던 권한을 말한다.
의회(국회)의 소집 및 개폐ㆍ독립명령ㆍ조약체결ㆍ선전포고ㆍ계엄선포ㆍ군통수ㆍ행정관제ㆍ관리임면ㆍ영전수여ㆍ비상대권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국가에 있어서는 의회보다도 군주가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권의 범위는 극히 광범위했다. 
대한제국 병탄 후 일왕은 ‘한일병합에 관한 조칙’에서 “짐이 생각건대 통치의 대권에 의하여 이에 비로소 치화(治化)를 조선에 실시함에 있어서 인민을 위무하여 적자(赤子)를 구휼하는 뜻을….” 따위의 언사를 농하였다. 그들에게 ‘대권’은 법이고 나발이고 필요없이 엿장수 맘대로 다스리겠다는 뜻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탈하면서 인류의 보편적인 상식이나 국제법상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수법을 총동원했다. 병합조약문에서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하고”라고 내세웠다.
병탄조약의 주요 조항은 이러하다.
제1조 :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가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과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순종과 왕실ㆍ왕족에 예우를 함으로써 한국민의 저항을 피하려 했다. 일제는 고종ㆍ순종과 왕족에게 일정한 급여를 지불하고 이를 ‘세비’라 불렀다. 최근까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에게 지급된 월급을 세비라고 한 것도 이에서 연유한 것 같다.
일제는 병탄조약 공포와 동시에 대한(大韓)의 국호를 폐지하고, 통감부를 대신하여 조선총독부를 개설, 초대 총독에 악명높은 데라우치를 임명했다. 이와 함께「한국합병칙서」를 발표하여 광무황제를 이태왕, 융희황제를 이왕, 광무황제의 아들 강과 희를 공(公)으로 불러서 세습하게 하여 일본 황족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또 일본황실령 제14호로 ‘조선귀족령’을 반포하여 합병에 공을 세운 친일파와 구한국 고관 75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나눠 주고, 전국의 유생 721명에게 회유책으로 30만 엔을 살포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조인된 병탄조약은 그러나 1주일 뒤인 29일에 공개했다. 여기에는 부끄러운 사연이 따른다. “한국정부가 갑자기 그달 28일 순종황제 등극 4주년 기념회를 열어 축하하기를 청하여” 연기했다는 것이다. 망국군주나 조정대신들은 국권을 빼앗긴 부끄러움도 모른 채 등극축하연을 적국에 요청한 것이다. 
중국인 량치차오의〈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에 따르면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있는 자들은 조선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비웃었다. 무능한 위정자는 범죄자다. 해방 76주년을 맞은 이제까지 국권을 빼앗은 강도들의 통치용어를 스스럼없이 쓰고 있는 것은 역시 ‘달관’한 때문일까. 
아시아의 모범적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대권주자’ ‘대권후보’ ‘대권경쟁’ 따위의 시대착오적인 일제식민통치 용어를 언제까지 사용할 터인가.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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