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3ㆍ1정신과 건국이념은 통일국가의 지표

<김주언 칼럼>3ㆍ1정신과 건국이념은 통일국가의 지표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3.01 13:30
  • 수정 2019.03.0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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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ㆍ1절 중앙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ㆍ1절 중앙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100년 전 3월1일 오후2시 29명의 민족대표는 서울 태화관 1실에 모였다. 독립선언서 낭독은 생략한 채 한용운이 간단한 인삿말을 했다. 이어 “독립만세”를 삼창했다. 선언서는 전국 각지에 배포됐다. ‘오등은 자에…’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했다.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으로 구성됐다. 천주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일부 인사는 뒷일을 대비해 빠졌다.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은 “학자로 남겠다”며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들까지 합하면 독립선언에 참여한 인사는 49명이다.

곧바로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쳤다. 참석자들은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지방에서 뒤늦게 올라온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은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김병조 한 사람만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구속을 피했다. 일행은 취조를 마친 뒤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됐다. 4월4일에는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됐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국사범에 해당한다. 예심 재판부는 이들을 내란죄로 극형에 처할 방침이었다. 재판부는 공약3장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을 문제 삼았다. 민중폭동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8월 상순에는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인의 반감을 우려한 나머지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고등법원은 내란죄 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처리토록 했다. 1920년 10월30일 경성복심법원은 최종판결을 내렸다. 손병희는 7명과 함께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도중 양한묵은 옥사했다.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던 도중 상하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됐다. 손병희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나 이뤄지지는 않았다.

알려진 것처럼 3,1운동은 비폭력 시위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민족대표들은 비폭력으로 끌어갈 생각이었으나 일부지역에서는 면사무소와 주재소 방화 등 공격적 시위가 펼쳐졌다. 일제와 정면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경기 남부에서는 시위대가 주재소를 습격해 도망치던 일본순사를 구타해 처단하기도 했다. 일제의 통제력이 약하거나 시위대 동원역량이 있는 곳에서는 공세적으로 전환됐다. 경기 안성에서는 주민 1,000명이 “일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함성과 함께 면사무소와 우편소 주재소 등을 불태웠다.

그러나 단순한 폭력행사는 아니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적 성격이 강했다. 3월4일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장터에서는 매복해 있던 일제 순사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이에 반발해 주재소 소장과 조선인 헌병보조원 등을 살해했다. 자위권 차원의 대응이었던 셈이다. 폭력시위가 벌어진 지역에서도 일본 상인이나 부녀자를 상대로 한 보복은 벌어지지 않았다. 맨손으로 총칼에 대항하는 평화시위 기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3.1운동은 복잡한 국내외 정세와 맞물려 조선인들의 밑바닥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일순간에 폭발한 대사건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조건으로 제시한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대폭 증원하는 등 무단통치는 가혹해졌다.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는 조처도 잇달았다. 일본인의 한국 토지 점유를 위한 토지조사 사업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헤이그 밀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저항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도면회 대전대교수는 3.1운동의 배경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조선을 일본통치에 적합하게 바꾸기 위해 강행한 제도의 부작용으로 축적된 분노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여기에 세계대전 이후 쌀값 폭등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층과 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종교지도자의 정치적 부상 욕구도 한몫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정세의 변화도 요인으로 꼽힌다. 도교수는 “이러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해 대규모 민중봉기가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을 촉발시켰다. 1919년 3월과 4월 국내외에서 정부 조직 8개가 선언됐다. 실제로 조직과 기반을 갖춘 곳은 노령(러시아)과 상하이 한성 등 3대 임시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청년 항일운동 단체 신한청년당 인사와 민족대표 33인의 위임을 받은 현순 등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최고기관 설립을 논의했다. 4월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뒤 이튿날 10조로 이뤄진 임시헌장을 공포했다. 3개 임시정부는 9월 통합을 이뤘다.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되 정부위치는 상하이에 두기로 했다.

4월11일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명,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정체와 국체는 제헌헌법의 바탕이 됐다. 현행 헌법의 근간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는 여기에서 유래됐다. 조소앙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이며, ‘조선’이라는 전제군주제와 결별한 민주공화정임을 선포한 기념비적 사건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외세의 개입으로 한반도는 분단됐다. 해방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수립,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념갈등이 심화했다.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친일파들은 하루아침에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반공전사로 탈바꿈했다. 이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반공주의는 더욱 강화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명박정권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는 뉴라이트 세력이 득세하면서 과거로 되돌아갔다.

이른바 ‘건국절 논란’이 대표적이다. 정부수립일인 8월15일을 건국절로 정해야 한다는 일부 보수세력의 주장이 등장했고 이명박근혜 정권은 이에 동조했다. 건국절 지정 시도에는 친일기득권 세력의 음모가 숨겨 있다. 이들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조차 부정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친일파들이 건국공신으로 우대받도록 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기득권 세력의 반민족행위를 지우고 민족지도자로 부상하겠다는 의도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겠다”는 선언조차 부정한다.

건국절 논란은 일단락지어졌다. 그러나 다시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제는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비로소 한반도를 아우르는 건국이 가능해진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민족독립 열망이 3.1정신이라면, 민주공화제는 임시정부의 건국이념이다. 평화번영의 통일국가 건설에 대한 염원은 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을 위한 남북·북미회담이 이어지고 있다. 100년의 과거를 딛고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3.1정신과 임정의 건국이념은 우리가 간직해야할 가장 중요한 정신적 지표이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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