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가 올해 첫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총선 기간 동안 이승만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과 대립각을 이루면서 영화 외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는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한다.파묘는 무속과 풍수지리 등을 소재로 곳곳에 항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용을 분석하지 않아도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소품에서부터 이런 메시지는 드러난다. 지관 상덕, 무당 화림과 봉길, 주지 원봉 등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겹친다. 차량번호 또한 광복절과 3・1운동, 해방을 연상시
1910년 12월 30일 한밤중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무리가 있었다. 남자들은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그야말로 남부여대의 행렬이었다.일본군 국방수비대의 검사가 있었지만 워낙 추운 날씨이고 초라한 행렬이라 그대로 보냈다. 당시 빚을 진 조선 농민들의 야반도주로 보았던 것 같다. 일제가 두고두고 개탄했던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일가의 망명길이다흔히 지식인의 유약성이 논의되지만, 우당은 조선 선비의 신분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이후 줄곧 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과 함께하였다. 죽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 이래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긴 채 야만적인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한민족이 비록 국외의 임시정부이지만 강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지 80주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의 명으로 조소앙이 기초한 ‘대일선전성명서’(선전포고)를 공포하고, 일본정부는 물론 미ㆍ영ㆍ중ㆍ소 등 4개국에 발송하였다.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지 (12월 8일) 이틀 만이다.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은 헌법(대한민국 임시약헌) 절차에 따라 일제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당
지난 7월 5일 광주광역시 광주제일고등학교 대강당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인 장재성 선생의 71주기 추모제가 열린 것이다. 이 추모제는 그가 숨진 1950년으로부터 70주기가 되는 지난해부터 열리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그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아들 상백씨(79)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참석해 관심을 모았다.장재성, 일제에 7년, 해방 후 7년 옥살이하다가 총살당해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봉준이 떠오르고, 3·1만세운동 하면 33인이 주역으로 떠오르듯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인 광주학생독립운동 하면 장재성
[데일리스포츠한국 최지우 기자] 세계호남향우회총연합회(회장 김영윤)가 지난 3일 전남도에 ‘고향사랑 성금’ 3천 300만 원과 ‘고향사랑 장학금’ 2천 200만 원을 전달했다.이날 전남도청에서 가진 전달식에는 김영록 전라남도지사와 세계호남향우회총연합회 전임 김원봉(2대), 이동수(3대) 회장과 정광일 사무총장이 참석했다.이번에 기탁 받은 ‘고향사랑 성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도민들께 지원되며, ‘고향사랑 장학금’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전남지역 청소년 44명에게 각각 50만원 씩 지급될 계획이다.이동수 세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진 듯했던 ‘사상전향’ 발언이 터져 나왔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의사당에서 ‘색깔론’이 버젓이 되살아났다. 그것도 4선의원을 지낸 장관후보를 대상으로 한 국회의원의 질의에서다. 탈북민 출신인 태영호 통합당 의원이 청문회에서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에게 따져 물었다. “주체사상을 버렸다, 주체사상 신봉자가 아니다, 라고 말한 적 있습니까?” 이 장관후보가 전대협의장 시절 주체사상을 신봉했다고 전제하면서 나온 사상공세이다. 독재정권 시절 운동권 학생들을 취조하던 공안검사의 표독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태의원은 질의시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 중국 우한(武漢)은 한국과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김원봉 장군이 무력투쟁을 위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곳이 바로 우한이다. 지난해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문화공연 ‘백년의 봄 IN 우한’이 열리기도 했다. 3개 도시가 통합되기 이전의 우창(武昌)은 신해혁명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1911년 청 황실의 철도국유화에 반대해 ‘보로운동’(철로를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으로 번져 청 왕조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
약산 김원봉선생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지휘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약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과 마지막 국무위원,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다. 약산에게는 당시 100만원(현재가치 320억원)이라는 최고의 현상금이 걸렸다. 백범 김구선생의 60만원 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만큼 일제는 그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약산은 해방직후 북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왔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체포하여 심문한 자는 한국인 경찰이었다. 친일 고문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에게 따귀를 맞은 약산은 사흘동안 울부짖었다.약산은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빨갱이의 탄생’ 저자인 김득중박사의 말이다. 김박사는 여순사건으로 빨갱이가 탄생했다고 본다. 이때부터 빨갱이는 정치적 반대파를 낙인찍는 말로도 사용돼온 것이다.빨갱이는 특정 정치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