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언제까지 약산을 색깔론으로 재단하려는가

<김주언 칼럼> 언제까지 약산을 색깔론으로 재단하려는가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6.2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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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선생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지휘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약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과 마지막 국무위원,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다. 약산에게는 당시 100만원(현재가치 320억원)이라는 최고의 현상금이 걸렸다. 백범 김구선생의 60만원 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만큼 일제는 그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약산은 해방직후 북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왔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체포하여 심문한 자는 한국인 경찰이었다. 친일 고문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에게 따귀를 맞은 약산은 사흘동안 울부짖었다.

약산은 1948년 남북협상에서 남쪽대표로 참석했다가 북한에 눌러 앉았다. 북쪽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각료를 맡았다. 그는 남쪽에 있을 때 백색테러의 위험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였다. 백범선생이나 몽양 여운형선생이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쪽에 머물렀다면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1958년 북한에서도 숙청되고 말았다. 분단의 한국사가 낳은 비운의 독립운동가인 셈이다.

최근 문재인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놓고 또다시 약산의 서훈 추서에 대한 논란이 빚어졌다. 문대통령은 “이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좌우합작’을 통해 창설된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임을 언급했다. 대한민국 헌법이 뿌리를 둔 임시정부의 다양한 구성을 예로 들어 ‘통합의 보훈’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약산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색깔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오로지 애국의 뿌리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문대통령 말대로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1941년 12월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 1943년에는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1945년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통합된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된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약산의 서훈을 놓고 색깔론을 들이댄 것은 자가당착적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의원들은 2015년 약산의 활약을 다룬 영화 ‘암살’의 국회 시사회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기 때문이다. 당시 김무성대표는 “국민 모두의 애국심을 다시한번 고취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보자”라고 제안했다. 당 주요인사들은 만세삼창을 했다. 이에 대해 한국당 민경욱대변인은 ‘항일영화’에 환호한 것이지 ‘전쟁원흉’에 박수친 것은 아니라고 했으나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한국당이 떠받들던 ‘박근혜 국정교과서’에도 약산을 비중있게 다뤘다. 국정교과서는 최종본까지 만들었지만 문재인정부 출범과 함께 사라졌다. 국정교과서 결재본인 고교 ‘한국사’에는 일제강점기 서술부분에서 약산을 백범보다 앞세웠다. 김원봉 이름만 12번 나온다. 백범이 이끈 한인애국단보다 약산이 이끈 의열단을 앞세워 비중있게 설명한다.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 단체로는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이 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에서 김원봉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더구나 2015년 8월 새누리당 기관지 새누리비전은 1920년대 독립운동을 다룬 대목에서 약산의 의열단을 언급하면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독립투사들의 뜻과 정신을 다시한번 기리자”고 썼다. 지난해 3월 경남 밀양시는 약산 생가터를 매입해 의열기념관을 열었다. 의열기념관은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미상이다.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했으나, 영화 ‘암살’로 그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그의 행적을 설명했다.

약산은 민족주의자였다. 의열단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계열뿐만 아니라 국민당과도 교류했다.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이념과 노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임시정부와도 거리를 두었다. 임정인사들의 파벌싸움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약산은 아나키스트 유자명선생을 통해 신채호선생을 소개받았다. 신채호선생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을 쓴 계기이다. “민중은 우리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하야, 부절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의 한 구절이다.

의열단원들은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초 조선총독부 등 주요시설에 대한 폭탄투척 등이 이어졌다. 1924년에는 도쿄의 일왕궁성 앞에 폭탄을 투척했다. 비록 실패했으나 일제가 신처럼 받드는 왕궁을 공격했기 때문에 일제를 충격에 빠뜨렸다. 일제가 의열단을 끔찍이 무서워한 이유이다.

월북한 약산은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했고 장관급인 국가검열상에 취임했다. 월북의 대가는 컸다. 한국전쟁 와중에 약산의 형제들 중 4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도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약산의 최후도 순탄하지 않았다. 1958년 숙청된 이후 약산의 이름은 공식문서에서 사라졌다. 약산은 간첩죄로 숙청당한 김달현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약산이 김일성 유일체제에 적극 협조하지 않은 게 근본이유였다.

약산이 서훈조차 받지 못한 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현충원에 묻혀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이들은 해방직후 민족주의자로 돌변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죽거나 월북 말고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현재 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1명이 묻혀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는 63명이나 된다. 오죽하면 임시정부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선생이 “내가 죽거든 친일파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겠는가.

1980년대 전두환정권 때까지 월북인사들의 이름은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약산은 물론, 월북작가들의 이름조차 금기어였다. 이들의 작품도 금서였다. 자칫 이름을 발설했다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현재 널리 알려진 백석시인의 애타는 사랑은 알 수 없었다. 정지용시인의 ‘향수’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작품은 노태우정권 시절에야 해금됐다. 이념의 잣대만으로 예술작품을 농단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렇다면 약산의 독립운동은 이들의 예술작품만도 못하다는 것인가.

약산 김원봉선생을 더이상 폄하해서는 안된다.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서훈은 어렵다.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 및 동조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포상에서 제외되는 심사기준 때문이다. 지난해 1948년 이전 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심사기준을 개정했지만 북한 정권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약산의 독립운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당은 아직도 색깔론으로 재단한다. 독립운동은 이념을 떠나 민족의 이름으로 기려야 한다. 뒤틀린 한반도 현대사의 흐름을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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