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김성의 관풍(觀風)>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 기자명 김성 소장
  • 입력 2021.07.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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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5일 광주광역시 광주제일고등학교 대강당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인 장재성 선생의 71주기 추모제가 열린 것이다. 이 추모제는 그가 숨진 1950년으로부터 70주기가 되는 지난해부터 열리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그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아들 상백씨(79)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참석해 관심을 모았다.

장재성, 일제에 7년, 해방 후 7년 옥살이하다가 총살당해

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봉준이 떠오르고, 3·1만세운동 하면 33인이 주역으로 떠오르듯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인 광주학생독립운동 하면 장재성과 성진회·독서회가 대표적인 주역이다.

장재성은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 청소년 학생들로 조직된 비밀결사 성진회를 결성했던 주역이다. ‘성진(醒進)’은 ‘깨우쳐 나아가자’는 뜻이다. 1927년 졸업 후 일본 중앙대에 유학갔다가 돌아온 그는 1929년 광주시내 각 중등학교에 비밀리 독서회와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했다. 이 해 11월 3일, 한국의 개천절(음력)이자 일본의 명치절(일본 명치왕의 생일)을 맞아 광주역 앞에서 한일 학생 수 백명이 패싸움을 벌였다. 장재성은 보다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구호제창, 유인물 작성 및 배포, 시위 주도 학생 등을 정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하여 11월 12일 광주 장날에 다시 광주시가지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도록 했다. 이 학생독립운동은 1930년까지 전국으로 확산됐다. 검거 후 그는 성진회와 독서회 관련 피의자로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대구복심법원에서 4년 형을 받아 당시 관련자 가운데 가장 오래 옥살이를 했다. 1937년 일본에서 다시 신흥과학연구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미결수로 있다가 1940년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광주건준에 참여하여 이 해 12월 광주청년동맹 의장에 선임됐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7월 북한에서 열린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194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 1950년 7월 5일 헌병들에게 끌려가 광주시 북구 동림동에서 총살됐다. 1960년 제 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그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서훈이 취소되고 말았다. 결국 해방 전 7년, 해방 후 7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사상’ 때문에 끝내 숨져 한국의 현대사가 남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42년의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조국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편히 쉴 자리나 후대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자리를 잡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아들 상백씨는 아버지의 총살 트라우마에다 경찰과 정보기관의 계속된 감시로 세상과 등지고 살아오다 올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상백씨는 추모식에서 바뀐 세상에 감격해서인지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기준 융통성” 지시도 무시

2016년 선거운동 기간 중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던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국내 3대 독립운동의 명성에 비해 기념식 규모가 초라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유족들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훈처와 교육부가 주도하여 성대한 기념식을 갖도록 하고, 사회주의자였더라도 북한 정권수립에 관계하지 않았다면 서훈을 검토하라. 여성의 경우는 감옥살이를 짧게 했거나 퇴학 등 불이익을 당한 것만으로라도 서훈을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장재성에게는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지역사회에서는 장재성 신원(伸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장재성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장재성 선생 추모제(2020년 7월 5일)를 시작했고, 그를 비롯해 73명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요청서를 제출했으며(2020년 5월 27일), 장재성 흉상 제막(2020년 10월 30일), 광주고보·광주여고보 퇴학자 60명의 서훈요청서 제출(2020년 11월 3일),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의 미서훈자 45명에 대한 서훈요청(2021년 5월 21일) 등을 했다. 2021년 3·1절에 발표된 결과는 23명에게만 서훈이 있었을뿐 장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박용진 국회의원 직접 서훈요청, 이병훈 국회의원은 ‘상훈법’개정 요구

사회주의 활동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자 2020년 8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이병훈 의원이 상훈법을 일부 개정하여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통치에 맞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독립훈장’을 수여하도록 하자는 법률안을 제출하였다. 사상에 집착하지 말고 융통성을 보여 국민통합에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마저도 국회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자 2021년 5월 18일에는 300여명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미서훈자에 대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는 대자보와 현수막을 망월동 국립묘지를 비롯해 광주시내 곳곳에 내걸기까지 했으나 가타부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나라 전체 보훈대상자 840,698명(2021년 6월 30일 기준)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16,685명으로 전체의 1.98%에 불과하다. 또 국가보훈처가 ‘학생운동’으로 분류한 독립유공자는 648명으로 독립유공자 가운데 3.88%만 차지하고 있다. 일본 경찰의 비밀문서는 194개 학교 54,000여명이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2006년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 조사한 보고서는 320개 학교가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경찰에 검거돼 송치, 즉결, 훈계방면 등을 받은 사람은 모두 5,571명이었고, 이 가운데 학생이 4,565명이었다. 그런데도 학생독립운동유공자가 648명 밖에 안된다니 국가보훈처가 유공자 신청만 기다리고 있었지 직접 찾아 나서는데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 1919년 광주에서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1년 6개월 옥살이를 한 경성의전 학생 김범수는 지금의 전공의 같은 일을 해 ‘조선총독부 의사’라는 경력이 올랐는데 이것이 ‘친일’의 근거가 되어 미서훈자가 됐다. 강석봉도 수 천장의 유인물을 제작해 같은 징역형을 살았지만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고 서훈이 거부됐다. 강석봉 일가는 5형제가 독립운동을 해 존경받을만한 집안인데도 아직까지 이데올로기 족쇄에 묶여있다. 1930년 1월 광주고보에서 백지동맹으로 퇴학당한 이기홍도 사회주의 운동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상’이 문제라면 작고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만 별도 서훈 검토해야

서훈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은 사회주의였다. 그 사상의 고리로 해방 이후 인연을 끊지 못한 독립운동가도 있었지만 북한 정권에서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작고했다. 작고한 분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독립운동’ 명예뿐이지 ‘사상’은 잊혀진 과거가 됐다. 그래 사상 때문에 안된다면 독립훈장을 별도로 주고, 독립유공자로 별도 관리하자는 대안까지 제시했으나 유공자를 심사하는 국가보훈처의 관련자들은 여전히 닫힌 시각에 머물러 있다.

경남 밀양시의 경우 2018년 김원봉을 비롯한 밀양출신 의열단원 12명을 기리는 ‘밀양의열기념관’을 김원봉의 생가터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주변을 태극기로 가득 채워두고 있다. 김원봉은 북한정권 수립때 장관으로 참여하였다. 밀양의 정치적 환경은 국회의원 시장 지방의원 등 선출직들이 ‘보수’가 주류인 이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하든 말든 한때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무장독립운동의 영웅이었기에 김원봉을 기념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그런 기념사업을 바라고 있는걸까? 북한 정권수립에 참여하지도 않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을 단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국가보훈처를 점차 불신하게 되고 별도의 공훈(功勳)을 선양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 결자해지 심정으로 후손들의 恨 풀어줘야

해방 이후 76년이 지나도록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였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이다.

오는 8월 15일이면 새로 선정된 독립유공자를 발표하고 대통령이 유족들에게 훈장을 달아 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는 올해가 마지막 기회이다. 대통령은 결자해지(結者解之) 심정으로 유공자 선정 기준에 융통성을 적용하여 장재성 등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에게 해방된 국가의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주어 후손들이 늦게나마 한을 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 성(지역활성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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