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일제에 선전포고하다

임시정부, 일제에 선전포고하다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2.09 09:54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 이래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긴 채 야만적인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한민족이 비록 국외의 임시정부이지만 강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지 80주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의 명으로 조소앙이 기초한 ‘대일선전성명서’(선전포고)를 공포하고, 일본정부는 물론 미ㆍ영ㆍ중ㆍ소 등 4개국에 발송하였다.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지 (12월 8일) 이틀 만이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은 헌법(대한민국 임시약헌) 절차에 따라 일제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당시 ‘약헌’은 “국무위원회 주석 및 국무위원을 선거하며, 또한 주외 사절의 임면 및 조약의 체결과 선전ㆍ강화를 동의할 때는 총 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제10조)고 하여 임시정부 전체의 의사로 대일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는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상실한 지 31년 만이고 임정이 수립되고 22년 만에 결행한 최초의 대일 전쟁선포였다. 나라가 망하고 국내에서 활동이 막히자 해외로 망명하여 세운 임시정부가 민족의 이름으로 ‘강도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전을 포고하였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려달라”면서 조선을 침략하는 술수로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1937년 중국을 침략하면서도 베이징 교외 노구교사건을 조작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 절차에 따라 의정원에서 사안을 논의하고 이 분야에 능력을 갖춘 조소앙 외교부장에게 역사적인 성명서 초안을 맡겼다. ‘선전성명서’는 서문에서 “우리는 3천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ㆍ영국ㆍ미국ㆍ캐나다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선전을 선포한 것이다. 일본을 격파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는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을 일컫는다.
임시정부가 일제의 진주만 기습 이틀 만에 신속하게 선전포고를 한 것은 정치ㆍ외교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외교면에서는 이미 대일선전포고한 여러나라들과 국제적 유대를 갖고 참전국의 일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국제적인 승인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은 그동안 임시정부를 부정해왔던 김원봉 주도의 민족혁명당에 참여의 길을 튼 것이다. 실제로 민족혁명당은 선전포고한 당일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였다. 내부의 절차 때문에 실제로 참여는 다음 해로 넘어갔지만, 참여 결정은 당일이어서 대일선전포고가 좌우합작의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베이징 시각으로 12월 8일 새벽 4시경이다.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은 비슷한 새벽녘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8일 낮에야 통신사 뉴스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인들은 임정청사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대일선전을 포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일선전성명서
우리는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ㆍ영국ㆍ미국ㆍ캐나다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선전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 합병조약과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해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창춘과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교부장 조소앙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제1항에서 모든 한국인과 임시정부는 오래 전부터 일제와 싸워왔음을 밝히고 일본ㆍ독일ㆍ이탈리아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포한 사실을 적시하였다. 제2항은 경술년 병탄조약을 비롯 모든 불평등조약이 무효임을 천명하고 여타 국가국들과 합리적으로 맺은 조약과 이들에 주어진 기득권은 앞으로도 인정한다는 것이다.제3항은 임시정부와 한국은 중국과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물리칠 때까지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제4항은 일제가 중국에 세운 괴뢰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즉 창춘에 세운 만주국, 난징의 왕조명(汪兆銘) 정부를 부인하고 중국정부를 유일합법으로 인정한다는 것. 제5항은 루스벨트와 처칠이 합의한 ‘대서양헌장’이 한국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이 헌장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문제와 관련 “관계 주민의 자유의사에 따르지 아니하는 영토변경을 인정하지 않으며, 주민이 정체(政體)를 선택하는 권리를 존중하고 강탈된 주권과 자치가 회복될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선전성명서에 이 부분을 포함시켰다.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파스시트 축심국 특히 일제에 선전을 포고하고 광복군을 동원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관내에 침투한 침략군을 물리치고자 국제 사회에 이를 선포한 것이다. 
짧은 시간에 이토록 기민하게 그리고 필수적인 내용ㆍ과제와 향후 대책까지 성명서에 담을 수 있었던 조소앙의 필력과 국제 감각을 다시금 살피게 한다. 
임시정부가 일제의 대미전쟁 도발에 때맞춰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의 실체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 대일전에 대비하였다. 광복군이 아니었으면 정부의 대일선전포고는 가능하지 못하고, 한갓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기구(OSS)와 합동으로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미얀마 전선에서는 영국군과 대일전을 벌였다. 
중국정부가 이른바 ‘9개준승’을 내세워 중국군에 예속시켜 행동을 속박하고 통수권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김구 주석의 줄기찬 협상 끝에 광복군의 독립성을 회복하였다. 이에 비해 6.25전쟁이 끝나고 70여 년이 될 때까지 아직도 전시작전지휘권을 회복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광복군이 해방 후 환국하여 국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면 5ㆍ16 쿠데타와 12ㆍ12 군부반란 그리고 5ㆍ18 광주학살 등 군부의 반역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시대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침략과 만행은 끝이 없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들이 무수히 살육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반성하거나 용서를 빌지 않았다. 결국 국치 31년 만에 임시정부가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김삼웅(논설고문)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