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토착왜구’와 ‘냉전좀비’

<김주언 칼럼> ‘토착왜구’와 ‘냉전좀비’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3.28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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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뜬구름 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관료층이 이에 해당한다. (2)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 일본의 침략행위와 내정간섭을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이 이에 해당한다. (3)일본군에 의지하여 각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친일단체 일진회 회원들이 이에 해당한다. (4)저들의 왜구짓에 대해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온갖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 토왜들을 지지하고 애국자들을 모험하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시정잡배가 이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글 ‘토왜천지(土倭天地)’를 현대어로 풀어 쓴 글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씨가 최근 유행어인 ‘토착왜구’를 설명하며 소개한 글이다. 이 글은 토왜(土倭)를 한마디로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로 규정했다.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이라는 뜻이다. 전씨는 “자기이익을 일본이익과 합치시켰던 토왜의 행태가 새삼 관심거리가 되고, 이를 현대어로 풀어 쓴 토착왜구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은 당시의 토왜들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토착왜구’는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기 이전에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널리 쓰였다. 특히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해방직후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됐다”는 망언 직후 불거져 나왔다. 민주평화당이 “나대표가 토착왜구라고 커밍아웃했다”며 “반민특위에 회부하라”고 논평을 냈고, 한국당은 모욕죄와 명예훼손죄 등 법적 조치가 이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에 정동영대표는 “토착왜구가 21세기 대한민국 한복판을 휘젓고 있다”고 가세했다. 때 아닌 ‘토착왜구 논란’이 정치권에서 불붙은 것이다.

민주당은 한발 더 나아갔다. 윤호중 사무총장은 “한국당을 극우 반민족당이라고 이야기하고 나원내대표 이름이 ‘나베경원’이라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고 비난했다. 한국당이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해 일본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비난이 커지면서 나온 말로 보인다. ‘나베경원’은 아베 신조 일본총리 이름에 나경원 원내대표의 이름을 합친 신조어이다. 인터넷에서도 널리 쓰인다. 이제 나대표를 ‘토착왜구의 수석대변인 나베상’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나대표의 국회연설에 빗대서 나온 합성어이다.

반민특위는 한국현대사에서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제헌의회가 일제강점기 민족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구성한 법정이었다. 1948년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고문한 고등계 형사들과 일제와 야합해 단물을 빨아먹은 부호들, 일제에 부역한 지식인들을 처벌대상으로 했다. 다시는 사리사욕을 위해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자는 당위성 때문에 국민적 환호를 받았다. 친일파에 대한 처벌은 보복이 아니라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민특위는 4개월동안 300여명을 반민족 행위자로 체포하는 등 활동으로 국민의 환호를 샀다. 친일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대통령이 곱게 볼 리 없었다.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담화를 내놓았다. 급기야 그의 사주를 받은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조사서류를 강탈했다. 결국 이듬해 8월 반민특위는 성과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국민적 염원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국민을 분열시킨 것은 반민특위가 아닌 이승만과 친일기득권 세력이었던 셈이다.

어깨를 움츠렸던 악질 친일형사들은 이후 당당히 어깨를 펴고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1년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들은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 친일세력은 ‘반공’을 내세우며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친일경력은 철저하게 세탁했다. 민족반역자들이 또다시 권력을 휘두르는 역설이 버젓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반공을 앞세운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기득권 수호에 급급했다. 민족과 민주를 앞세운 지식인과 학생 등 저항세력은 ‘용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워 처형하거나 감옥에 처박았다. 한국현대사의 질곡은 반민특위의 강제해산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민특위가 해산된 이후 55년만에 노무현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나섰다. 모두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가려내 보고서를 발간했지만 때늦은 시도였을 뿐이다. 이들은 이미 작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친일재산환수에도 나섰으나 여전히 후손에게 대물림이 끝난 이후였다. 친일파들은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아가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이유이다.

반공을 앞세운 친일파들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기득권을 공고하게 다졌다. 이들은 ‘공산주의 위협’이라는 공포를 앞세워 민주·민족 세력을 탄압했다. 박정희·전두환독재정권을 비호하는 데 앞장섰던 공안세력이 그들이다. 간첩을 조작하고 일제강점기의 고문수법을 답습해 인권을 유린하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한반도평화가 조성되는 현시점에서도 이들의 냉전의식엔 변함이 없다. 이른바 ‘냉전좀비’가 그들이다.

냉전좀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전매특허는 ‘빨갱이’ ‘좌파’이다. 비판세력을 몰아붙이는 선동용어이다. 자신들은 ‘애국 우파’로 포장한다. 최근 주요 현안에 ‘좌파 딱지’를 붙이며 색깔론 공세에 열을 올리는 인물이 바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이다. 황대표는 원색적 발언을 쏟아내며 철지난 이념전쟁에 몰두한다. 독재정권시절 공안검사의 인식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대북 적대정책에 몰두하던 박근혜정권의 총리를 지낸 경력도 이를 잘 말해준다.

황대표는 여야4당의 선거제합의에 대해 “좌파 홍위병 정당의 국회 진입”을 위한 것이라고 폄하했다. 정의당을 겨냥한 발언이다. 국민의 표심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선거제도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유불리만 따지는 이분법적 사고가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핵심세력은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다.” “좌파 소수야당은 애국우파를 탄압하는 홍위병이다.” 그가 쏟아낸 과격한 말들이다. ‘좌파’나 ‘홍위병’ 등 전매특허 용어들을 보면 ‘냉전좀비’로 규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두웠던 시절의 기득권 세력을 ‘토착왜구’와 ‘냉전좀비’로 부른다. 냉전좀비의 뿌리는 토착왜구로 한몸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다시 발호하려 한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사회가 과거로 퇴행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역사학계의 규탄으로 마무리한다. “정치인들은 정략에 눈먼 망발을 거두고 역사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들이여, 100년전 전국을 가득 메웠던 만세소리가 두렵지 않은가!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세상을 밝힌 수백만 촛불이 두렵지 않은가!”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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