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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칼럼> 사실상 불가침선언의 의미
  • 김주언 논설주간 ysk7474@daum.net
  • 승인 2018.11.0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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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군사당국과 유엔군사령부가 '9·19 군사합의'에 명시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를 위해 지난달 25일 JSA 내 모든 화기 및 탄약, 초소 근무를 철수했다. <국방부 제공>

올해 안에 일반인들도 판문점 도보다리를 걸으면서 남북정상처럼 정담을 나눌 수 있게 됐다. 지난 4월 판문점회담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유명한 장면을 재연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새들의 지저귐이 화음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이끌고 넘어갔다가 되돌아오던 군사분계선(MDL) 콘크리트 턱은 넘어갈 수 없다. 콘크리트 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비무장화가 성사돼 민간인도 출입이 가능해졌다. 판문점이 65년만에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난해 11월만 해도 판문점에서는 총격전이 있었다. 북측 경비병의 총격 속에 극적으로 북한군 병사가 남측으로 넘어왔다. 당시 북한군 1명은 한때 MDL을 넘어왔다가 돌아갔다. 남측 지역에는 총탄 흔적이 남았다. 지프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탈북자를 향해 총을 난사하던 긴박한 장면을 담은 CCTV 영상은 TV를 통해 여러 차례 방송됐다. 영화를 보는 듯 긴박감마저 느끼게 했다. 이제는 판문점에서 총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양측 경비병들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년만에 일어난 이러한 극적 변화를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남북 군사당국과 유엔사는 최근 JSA 안의 남북 모든 초소와 시설물 등을 대상으로 상호 공동점검을 완료했다. 지뢰제거, 화기 및 탄약 철수, 경비근무 인원 조정 등 비무장화 조치 등을 점검했다. 이로써 JSA의 풍경은 확 달라진다. 북측 초소 5곳과 남측 초소 4곳이 철수됐다. 무단 월북이나 월남에 대비해 남북 초소가 각각 1곳씩 새로 설치됐을 뿐이다. 경비병력도 각각 35명으로 줄인다. 이들은 노란색 바탕에 파란 글씨로 ‘판문점 민사경찰’이라고 새겨진 완장을 왼팔에 착용하고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올해 안에는 남과 북, 해외 관광객들도 JSA 안에서 남북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게 된다. 현재까지 관광객은 유엔군의 통제에 따라 제한된 복장과 동선을 준수해야 했다. 앞으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역내에서 제한없이 남북을 오갈 수 있게 된다. 다만 갑작스러운 우발사태를 막기 위해 유엔군 등의 주관에 따라 관광객 통솔이 제한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 3자협의체는 지난 6일 회의를 열고 최소한의 통제범위 등에 대해 논의했다. 중국과 미국 등 여행사들도 판문점 관람을 포함한 관광상품을 개발해 판매에 나섰다.

판문점은 예전에는 널문리로 불렸다.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약 50km, 개성 동쪽 10km 지점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초가집 몇 채가 있었을 뿐이다. 1951년 10월 25일 정전회담이 열리면서 이름 없는 한촌에 국제적 이목이 쏠렸다. 당초 예비회담은 개성 북쪽에 있는 내봉장에서 열렸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에서 북한군이 무력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북한군과 유엔군의 합의로 널문리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본회의 159회 등 모두 765회의 각종 회의를 거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을 조인했다.

이후 유엔측과 북한측의 합의에 따라 JSA로 결정됐다. 종전 직후 포로교환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71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한 최초의 남북접촉도 있었다. 이후 군사정전위원회뿐만 아니라 남북간의 접촉과 회담 장소로 활용됐다. 1989년에는 평양에 갔던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분단 이래 최초로 판문점 MDL을 걸어서 넘어왔다. 경비병들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남북 병사가 은밀하게 만나 담배와 술을 주고받기도 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탄생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판문점은 무력충돌도 잦았다. 1976년에는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했다. 유엔군의 나뭇가지 치기가 발단이었다. 북한군 병사들이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하고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달아났다. 이에 미국은 핵 항공모함과 폭격기를 출동시키고 일본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를 증파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유감을 표하며 일단락됐지만 후유증은 매우 컸다. 충돌방지를 위해 MDL을 표시하고 서로 상대측 지역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JSA가 ‘냉전의 상징’으로 고착화한 것이다.

MDL은 정전협정에 의해 남과 북으로 2km씩, 4km 구간이 비무장지대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비무장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각종 진지와 GP(경비초소) OP(전방관측소) 철책이 구축돼 세계적 중무장지역이 돼버렸다. 판문점이 비무장화한 뒤 이번에는 연말까지 시범적으로 11개의 GP가 완전 파괴된다. 이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나머지 모든 GP를 철수시키기 위한 실무협의도 진행된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최전방 초소가 있던 인제와 원통에서 군 복무를 하던 사병들의 한탄도 사라질 것이다.

남북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난 1일부터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단했다. 지상에서는 MDL 5Km 이내에서 포사격 훈련과 야간기동훈련을 전면 중지했다. 해상에서는 서해 덕적도부터 북측 초도, 동해에서는 속초부터 북측 통천까지의 수역에서 사격과 기동훈련을 멈춘다. 해안포와 함포의 포구에는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이 폐쇄됐다. 민간선박의 자유항행을 위한 한강하구 공동조사에도 착수했다. 공중에서는 전투기와 정찰기, 무인기 등의 비행이 금지된다.

이로써 남북이 상호 불신 아래 끝없이 벌여온 군사적 적대행위는 65년만에 끝났다. 미국이 아직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지만, 실질적 종전선언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불가침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앞으로 군사적 신뢰를 통한 군축의 길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최대의 화약고가 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11월 1일은 1953년 종전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판문점 사천내에 놓여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옛이름인 널문다리를 되찾을 수 있는 날, 통일의 날을 기다린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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