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과장과 밀라노 출장기

MZ 과장과 밀라노 출장기

  • 기자명 손혁기 SR 홍보부장
  • 입력 2024.02.2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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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장이 잡혔다. 출장 사유는 '미펠쇼(Mipel-The Bag Show)' 참가. 가죽과 디자인으로 유명한 밀라노에서 열리는 미펠쇼는 가방, 액세서리 등을 선보이는 세계 3대 가죽 패션쇼로 디자이너와 제작사, 바이어들이 참여하는 B2B 행사다. 3년 전부터 취약계층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과 ‘SRT 굿즈를 만들었다. 그때 목표 중 하나가 단순한 기념품에 그치지 않고 소비자가 구매하는 상품인 만큼 제대로 만들어서 '미펠쇼'에 선보이는 것이었다. 초청 방식이라 참여만으로도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 마케팅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업무이기는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 가는 해외 출장에 마음이 들떴다. 게다가 이탈리아라니. 대학생 때 읽은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한길사)부터 최근에 본 '지극히 사적인 이탈리아'(알베르토 몬디. 틈새책방)까지 매력적인 이탈리아가 빠르게 스쳤다.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가 유럽 여행에서 이탈리아를 마지막에 보라고 자랑할 만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 가장 많은 나라다.

한국이 '쌀 문화'에 기반한다면 이탈리아는 '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 둘은 생활 방식도 도시의 모습도 크게 다르다. 노동 집약적인 쌀농사가 집단주의 문화를 만들었다면, 너른 농토가 필요한 밀농사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낳았다. 수확이 많고 가공이 제한된 쌀이 지키는 문화라면, 수확이 적고 빵으로 가공된 밀은 확장을 쉽게 했다. 쌀로 밀집한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었다면, 밀은 작은 마을과 도시 국가를 번성케 했다. 여행의 목적 중 하나는 다름을 보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러모로 다른 이탈리아는 한국인에게 최고의 여행지다.

그런데 정부 조직이나 공공기관에서 해외 출장을 가려면 '공무국외 출장 심사'를 받아야 한다. 위원회에 출석해서 회사 업무에 직접 관련된 출장인지, 방문지와 출장자는 적합한지, 출장 목적에 맞는 기간인지 설명해야 하고, 다녀와서도 출장보고서를 꼼꼼하게 작성해서 누구나 찾아볼 수 있도록 공개한다. 단순한 시찰이나, 관광지가 포함되어 있으면 언론이나 국정감사에서 두들겨 맞기 십상이다.

하지만 동행하는 H과장의 주도로 준비는 순조로웠다. H과장은 인턴 경력 쌓고 졸업 후 2~3년은 걸린다는 공기업 취업을 4학년 말에 확정했을 만큼 재원이다. 행사를 진행하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 준비가 꼼꼼하다. 일 처리는 깔끔하고, 규정에 어긋남이 없다. 외모도 늘 단정하고, 주변은 언제나 정리 정돈되어 있다.

코로나19 이후 처음 우리나라 업체가 참가한 미펠쇼는 K, K드라마의 영향으로 기대 이상 많은 바이어들이 몰렸다. 함께 참여한 사회적기업들이 현지에서 계약을 바로 따낼 정도로 한국 제품은 인기였다. 전시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H과장에게 토·일요일에도 근무하니, 평일에 하루씩 자유시간을 갖고 인근 도시라도 둘러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H과장의 반응이 의외였다. 출장 승인을 전시회 참가로 받았으니, 전시장을 지켜야 한다. 전시장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 가면 안 된다고 규정을 확인해 줬다.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래도 철도회사 직원으로서 우리나라 SRT처럼 이탈리아에 새로 생긴 고속열차 이딸로는 타봐야 우리 열차 개선점도 찾지 않겠느냐고 타일렀다. 그러자 H과장은 그러면 본인은 전시장을 지킬 테니 부장님이라도 다녀오시라고 답했다. 물론 권유로 들리지 않았다. ‘부장이나 갔다 오라로 해석됐다.

공직자 일의 본질은 규정을 지켜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다. 업무뿐만 아니라 본인 관리도 엄격해야 한다. H과장뿐만 아니라 MZ 세대들의 일 처리 과정을 보면 규정과 공정에 대한 기준이 과거 세대보다 훨씬 엄격하고 민감하다. 특혜를 당연한 권리로 인식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청정 그 자체다. 그런 면에서 우리 공직사회의 장래는 밝다.

그런데 지난해 공무원연금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85,761명이던 20·30세대 퇴직자 수는 202211,067명으로 5년 사이 2배 가까이 늘었다. 인사혁신처는 자체 설문 조사에서 퇴직의 주된 원인으로 낮은 보수’, ‘경직된 공직문화’ ‘과다한 업무 스트레스를 꼽았다. 낮은 보수와 과다한 업무는 비교기준이나 해당 직무에 따라 안팎의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공직문화가 경직되어 있다는 점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정부가 제시하는 공무원 인재상은 국민중심, 소통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는 공무원 적극적이며 국가에 헌신하는 열정적인 공무원 창의적 사고로 변화에 대응하고 혁신을 이끄는 공무원 윤리의식을 갖추고 청렴하며 책임 있게 일하는 공무원이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가 보람의 영역이라면 네 번째는 의무다. 하지만 조직의 속성상 일하다 보면 상사를 중심으로 심기를 배려하고 국가나 국민보다 조직에 헌신해야 승진하며 새로운 일을 만들다 다치고 보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결국 규정을 지키고 청렴해야 한다는 의무만 남는다.

우리나라 공직문화는 확장하는 밀 문화보다 지키고 통제하는 쌀 문화에 가깝다. 또 공공업무의 속성상 비전에 맞춰 일을 찾기보다 해야 할 일이 규정에 맞는지부터 따지게 된다. 이렇게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울타리를 넓게 해주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철도회사의 공무국외 출장규정에 보면 현지 철도회사 벤치마킹도 목적에 해당한다. 미리 일정에 반영했더라면 그 먼 이탈리아까지 가서 이딸로도 타고 시사점을 많이 얻었을 텐데. 규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더 넓은 판을 만들어 줘야 하겠다. 출장 기간 내내 숙소-전시장, 전시장-숙소를 오가며 밀라노에 갇혀서 에스프레소만 연거푸 마셔대며 들었던 생각이다.

손혁기(SR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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