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의 첫 해외여행

어머니와의 첫 해외여행

  • 기자명 손혁기 홍보부장
  • 입력 2024.01.2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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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형이다. 일상의 안부를 묻는 그런 사이가 아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스마트폰 창을 열었다. “어머니 여권 사진 보내줘”. 이유도 없고, 설명도 없다. 꼭 이런 식이다. 여권용 사진이 필요한지, 여권 사본이 있어야 하는지도 구체적이지 않다. 짐작으로 어머니 여권을 찾아 사진을 찍어 보냈다.

새해를 열흘 앞두고 또 알림이 왔다. “29일부터 1일까지 대만. 일정 가능?” 일주일 뒤라 급하게 잡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처음으로 어머니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자니 그러자고 답했다. 지난해 너의 시간속으로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했던 대만 드라마 원작 상견니가 생각났다. 주인공 리즈웨이와 모쥔제가 만나던 32레코드점, 카페32, 보그티숍의 달달한 버블티가 떠올랐다. 또 소망을 담아 풍등 날리는 스펀, 홍등 가득한 지우펀에서 차 한잔, 그렇게 연말연시를 보내는 데 성수기면 어떤가. 비용이 좀 더 들면 어떤가. 마침 못 쓴 연차도 보상비로 나왔고.

다음날 항공권 4장을 샀으니 숙소를 알아보라고 연락이 왔다. 항공권만?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는? 식사는? 이동수단은? 밑도 끝도 없이 호텔을 잡으라니. ‘형수는 얼마 전에 패키지로 다녀왔으니까. 어머니랑 가 볼 만한 데로 정해? 나머지 한 명이 조카가 아니라 형수야? 자주하는 해외여행도 아니면서 갔던 데를 시어머니랑 다시 가? 할머니 잘 모시라고 조카에게 선물하나 사주고 편하게 여행하며 효도한 티도 내보려던 얄팍한 생각이 미안해졌다.

그나저나 그럼 침대는 트윈이어야 하고, 형수는 호텔 조식이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전에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대만 전문 여행작가에게 SOS를 쳤다. 새해맞이 불꽃놀이로 외국 여행객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때니 숙소부터 잡으라는 비관적인 정보만 얻었다. 새벽까지 예약사이트들을 뒤졌다. 숙박비를 예산 한도까지 올려도 좀처럼 조건에 맞는 방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 뒤 형이 호텔을 잡았다며 여행 일정을 짜라고 링크를 보내왔다. 다행이다. 형이 잡았으니 형수 기준에 맞췄을테고, 아니라도 숙소 불평은 형 몫일테니. 링크를 열었다. 그런데 3개다. 연말이라 호텔비가 오른 것은 이미 봤지만, 그렇다고 숙소를 매일 다른 곳으로 잡다니. 그럼 여행 내내 트렁크를 끌고 다녀야 하는데? 상황은 더 심각했다. 숙소 위치가 제각각이다. 그것도 타이베이 북부, 타이즁, 신베이. 우리나라로 치면 일산, 대전, 광명쯤인 셈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스펀은 재미없고, 지우펀은 사람이 많아서 형수가 별로라네.’ 머리가 아파왔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대중교통은 무리였다. 가까운 거리는 택시를 타도 관광버스, 광역철도, 고속열차까지 이용하는 강행군이었다. 퇴근해서 새벽까지 인터넷을 뒤졌다. 외국인 할인권을 받아 고속열차 승차권을 예약하고, 광역철도 좌석을 알아보고, 구간마다 택시비를 계산해보고, 첫날 점심 식당까지 정하고 나니 출발일이 됐다. 그렇게 여기저기 공백인 일정표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첫 외국 여행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지난해 말에 발표한 20233분기 국민여행조사에 따르면 해외여행 경험율은 3.8%,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4.4%에 비해서는 0.6%p 낮지만 크게 회복한 수치다. 4분기 결과가 나오면 코로나 이전 수준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한다. 인스타그램에는 일본,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넘쳐난다. 도시락으로 점심값을 아껴 여행경비를 모으고, 특별한 계획 없이도 하루 연차를 내서 주말에 일본 골목골목을 헤매며 초밥과 우동 맛집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는 직원들도 어렵지 않게 보인다.

같은 기간 온라인 패널을 이용한 여행행태조사에 따르면 여행 일정을 확정한 날짜는 1개월 전이 30.3%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2개월 전 22.6%, 3개월 전 15.6% 순이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도 조사에서 56.3%2~3개월 전에 해외여행을 확정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결정 기간이 짧아졌다. 그만큼 여행에 따르는 비용이나 일정의 부담보다 해외로 떠나겠다는 욕구가 크다.

하지만 그건 많이 다녀본 사람들 이야기다. 1주일 전에 급하게 산 항공권, 동선 엉망인 숙소들. 80이 다된 노모를 모시고 가는 여행에 나머지는 모두 미정이었다. 공백은 불안이었다. 상견니에 나온 카페23, 미슐랭 맛집, 홍등 가득한 지우펀에 대한 기대는 이미 출발 전부터 접었다. 여행 내내 풍경을 보는 눈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뒤지는 손이 바빴다. 첫날 점심으로 생각했던 식당부터 대기가 많아 틀어졌다. 고속열차 승차권을 잃어버려 부랴부랴 다시 발급받아야 했고, 구글 평점 높은 식당들은 예약이 꽉 찼다. 어머니와 묵은 숙소 침대는 트윈이 아니라 더블이었고, 욕실은 유리로 투명했다. 여행에서 생길 수 있는 변수는 곳곳에서 우리를 시험했다.

그래도 다행히 여행은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됐다. 타이루거 협곡을 걷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춤을 추듯 가벼웠고, 타이즁에서 샴푸 마사지를 받으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가장 환한 어머니의 웃음을 봤다. 회사 일이 바쁘다고, 아이 학원비가 많이 나간다고, 가고 싶은 곳이 다르다고 미뤄온 게 십 수년. 항공권 4장부터 저지르지 않았다면 사업하는 형과 일하는 형수까지 어머니와 넷이서 대만에서 저녁을 먹는 시간은 없었다. 무심한 아들들이 마련한 첫 해외여행의 부족함은 어머니가 채웠다. 마지막 날 늦어진 일정에 배고프시지 않냐는 물음에 어머니가 답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뭔지 몰랐는데, 너희들하고 여행 다니니까. 그 말이 뭔지 알겠더라. 정말 고마워. 수고했어.”

손혁기(SR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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