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비 온 뒤에 팔이 굳는다

[기자수첩] 비 온 뒤에 팔이 굳는다

  • 기자명 한휘 기자
  • 입력 2023.10.1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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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한휘 기자] 지난 14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2023 신한은행 SOL KBO리그 경기. 한화 선발 투수로 나선 펠릭스 페냐는 3회까지 안타 1개만 맞고 삼진 3개를 솎아내며 호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전국 곳곳을 스쳐 가던 비구름이 공교롭게도 한밭 머리 위를 지나갔다. 페냐가 이제 막 4회 초 초구를 뿌리려는 찰나에 폭우가 쏟아지며 경기는 중단됐고, 정비를 거쳐 51분이 지나서야 재개됐다.

오랜 우천 대기로 몸이 식었음에도 페냐는 마운드에 돌아왔고, 윤동희를 상대로 본인 평균보다 시속 10km 가까이 낮은 136km 패스트볼을 던지고 안타를 맞았다. 그리고 장시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한 달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지난달 17일 대전에서 열린 한화와 kt 위즈의 더블헤더 2차전 경기. kt는 선발 투수 웨스 벤자민의 호투로 3-1 리드를 잡고 있었다.

그러던 5회 말 첫 타자인 문현빈의 타석 도중 비로 인해 경기가 중단됐고, 3시간 24분이라는 KBO 역사상 가장 긴 재정비 시간 끝에 경기가 재개됐다. 벤자민은 다시 마운드에 올라 2B-2S 카운트에서 100km도 되지 않는 ‘아리랑 볼’ 2개를 던져 볼넷을 준 후 손동현과 교체됐다.

이러한 ‘촌극’의 원조는 따로 있다. 8월 20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 3회 초 시작 직전에 경기가 우천으로 중단됐고, 1시간 반 가까이 지나서야 재개됐다.

삼성 선발 투수 원태인은 그대로 마운드에 올라 김태군을 상대로 아리랑 볼 3개를 던져 땅볼로 잡아냈고, 이후 김대우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우천 대기가 길어지면 투수의 몸이 식고, 그 상태로 공을 던지면 몸이 굳은 상태인 만큼 다칠 위험이 크다. 따라서 긴 우천 중단 이후에는 투수를 교체해 주는 것이 정론이다.

그럼에도 페냐와 벤자민, 원태인이 마운드에 돌아온 것은 규정 때문이다.

KBO 공식야구규칙 5조 10항에는 ‘이미 경기에 출장하고 있는 투수가 이닝의 처음에 파울 라인을 넘어서면 그 투수는 첫 번째 타자가 아웃이 되거나 1루에 나갈 때까지 투구해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페냐와 벤자민, 원태인은 모두 이닝을 시작하기 위해 파울 라인을 넘어 마운드에 오른 뒤 경기가 중단됐다. 따라서 경기가 재개되면 이 규정에 따라 첫 타자를 잡아내거나 출루시켜야 교체될 수 있는 것이다.

해당 조항에는 예외가 있지만, ‘그 타자의 대타가 나온 경우 또는 그 투수가 부상 혹은 부상에 의해 투구가 불가능하다고 심판진이 인정할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단순히 긴 우천 중단으로 몸이 식어 부상이 ‘염려’되는 상황은 포함하지 않기에 투수가 억지로 한 타자를 더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투수가 몸이 굳은 채로 공을 던져야 해 부상 우려를 키우고, 부상을 막으려면 투수가 제 공을 던질 수 없는 만큼 해당 타석의 승부는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 따라서 투수의 팀이 불리한 상황을 일방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현장에서는 이미 규정에 손을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화 최원호 감독은 “경기 중단 30분을 넘어가면 선택권을 주는 방식의 개정이 필요하다”라고 의견을 피력했고, kt 이강철 감독 역시 “투수를 교체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꿔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투수의 몸을 보호하고 경기의 형평성을 지키며,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에게도 수준 높은 승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규칙 개정의 타당성은 차고 넘친다. 대다수가 지지하는 만큼 조속한 개정도 가능한 만큼, 조속히 손을 볼 필요가 있다.

비 온 뒤에는 땅만 굳는 것이 아니다. 투수의 몸도, 팔도 굳는다. 그러나 규정만큼은 그대로 굳어 있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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