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黎明)의 시간

여명(黎明)의 시간

  • 기자명 오진곤 교수
  • 입력 2023.10.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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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재촉하던 비가 내리더니 요즘은 완전한 가을날이다. 황금물결 출렁이는 들판 길을 걷노라면 몸 마음이 풍성해지고 콧노래도 절로 난다. 이른 봄 떠났던 기러기들이 편대를 이루어 우아한 날갯짓을 한다. 하얀 뭉개구름은 뭉실뭉실 다양한 형태를 이루며 파란 가을하늘을 화폭 삼는다. 아침엔 지난 봄날 심었던 고구마를 수확하였다. 고구마 한 순에서 여러 개의 고구마가 주렁주렁 매달려 산삼을 캐듯이 하나둘 땅속에서 꺼낸다. 팥도 깍지가 누렇게 익었다. 아주 작은 팥 한 알이 큰 줄기를 이루더니 20여 개의 깍지가 주렁주렁 달렸다, 하나의 팥깍지에 족히 10여 개의 팥이 들어있으니 팥 한 알에서 200여 개의 팥을 수확한 셈이다. 한 달 전 심었던 배추도 가을이 깊어가며 속이 꽉 차기 시작하고 무도 듬직한 뿌리를 곧게 내린다. 가을 당근은 벌써 주황색 뿌리를 제법 튼실하게 내렸다. 아내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오이를 가지고 오이소박이를 담그며 맛이 맞나 맛보라며 한입 넣어준다. 배가 절로 부르는 풍성한 계절 가을이다.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취침 기상 시간이 도심 생활과는 확연히 다르게 바뀌었다. 도심에서는 11시경 잠자리에 드는데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8시면 한밤중이다. 도심의 소음 대신 바다새 울음소리나 풀벌레 우는 소리는 교향곡처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9시 뉴스를 시청하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에게 침대로 가라며 아내는 채근한다. 그래서인지 새벽 4시경이면 눈을 뜬다. 여름엔 5시면 태양이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요즘은 630분경 여명이 밝아온다, 태양이 아직 보이지 않지만 빛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내 삶의 새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깊이 들이쉬고 내뱉는 들숨과 날숨을 통해 살아있음의 희열을 느낀다. 학생들이 만든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들어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그래 지금 우리 가족은 칠흑같은 어둠을 지나고 있는거야. 이 어둠이 거치면 곧 여명이 밝아오고 찬란한 아침을 맞을거야라는 어머니의 인터뷰가 나온다. 어둠이 거치며 여명이 밝아오는 그 시간은 소망의 시간이기도 하다.

199110월부터 19922월까지 국내 방송사에서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이후의 혼란기, 한국전쟁 시기까지이다. ‘한국 TV 드라마의 역사는 여명의 눈동자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제작 규모나 연출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종학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드라마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윤여옥(채시라)은 모친상을 당해 남원인 집으로 온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행방을 취조당하다가 만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다. 최대치(최재성)는 북경대학을 다니다 방학동안 고향으로 들어온다. 이 기간 일본군은 조선의 청년들을 강제 징집을 하는데 최대치도 징집된다. 최대치는 만주에서 위안부 일을 하며 삶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던 여옥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희망을 준다. 도쿄제국대학 의학을 전공한 장하림(박상원)은 하숙집 주인이자 교수의 미망인인 가츠코와 좋은 관계로 지낸다. 이를 질투한 고등계 형사 야마다에게 트집을 잡혀 강제 입영을 하게 된다. 일제의 지배가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조선인 학도병 대치와 일본군 위안부 여옥은 민족의 아픔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그러나 전쟁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사이판으로 끌려온 여옥을 만난 하림은 대치의 아이를 임신 중인 그녀를 보살피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세월이 흘러 고국에서 대남 공작원으로 여옥 앞에 갑자기 나타난 대치와 여옥은 결혼한다. 이후 대치는 지리산에서 빨치산 대장이 된다. 여옥은 그동안의 이적행위가 적발되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지만, 하림이 신원을 보증해 극적으로 풀려난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대치는 하림의 토벌대에 쫓기던 도중 총에 맞는다. 대치를 찾아 나선 여옥도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그녀를 안고 오열하며 역시 죽어가던 대치는 하림 앞에서 지난 삶을 뉘우치며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011115일에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아라비아 해에서 납치된 대한민국의 화학 탱커 삼호 주얼리를 구출하기 위해 <아덴만 여명 작전>이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 수행한 해상 작전이었다. 정부는 해적들에게 납치된 배를 되찾고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구축함과 30명의 해군 특수전사령부를 파견했다. 삼호 주얼리의 탑승 작전은 소말리아 해안에서 약 700해리 거리에서 121일 오전 458분 여명에 시작되었다. 이 구출 작전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이성호 중장에 의해 실시되었고 성공적인 군사 작전으로 칭송되었다.

여명은 새벽녘 희미한 빛으로 둘려싸여 있는 시간이다. 여옥과 대치와 하림 세 사람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 향한 뚜렷한 사랑이기보다는 연민과 사랑이 어우러진 안개 같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여옥은 그 험한 상황을 견딜 수 있었고 고국에도 돌아올 수 있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도 해적들이 예기치 못한 새벽녘의 시간이다. 게으른 더운 나라 해적들이 그 시간을 예상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부지런하고 치밀한 한국인의 근성이 그 작전을 성공시키는 큰 요인이라 생각된다. 이제 대한민국의 여명이 시작되어야 할 시간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끝나기도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반도도 언제라도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릴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을 이용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든든한 국방력을 세우고 정치권도 여야 협치를 통해 대한민국호가 순항해 나가도록 준비해야 한다.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손홍민 선수가 토트넘의 주장이 되면서 토트넘은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프리미어 리그 경기도 최고의 결과를 내고 있다. 손홍민 선수가 리더로 유능한 이유는 그의 실력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됨됨이 때문이다. 그 됨됨이가 표출될 때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된다. 대한민국호의 진정한 리더쉽이 필요한 이유이다.

오진곤(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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