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한 해이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한 해이길

  • 기자명 오진곤 교수
  • 입력 2023.02.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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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에 살면서 우연히 길고양이 두 마리를 기르게 되었다. 도시처럼 집들이 붙어있지 않고 수백 미터씩 떨어져 있다 보니 시골 마을은 상당히 한적한 동네 구조가 된다. 이웃들이 이런 환경에서는 개라도 한 마리 기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지만, 개를 기르는 낭만보다는 생명의 돌봄이라는 부담 때문에 선뜻 개를 기르겠다고 나서질 못했다. 작년 늦은 봄에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까망 하양 노란 세 가지 색을 지닌, 갓 태어난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났다. 배가 고픈지 눈치를 보면서 계속 야옹거리기에 밥을 몇 번 줬더니 아예 우리 집에 머물렀다, 추운 겨울이 오면서 라면박스에 헌 옷 몇 가지를 넣어 주차장 구석에 두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모자 길양이의 집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사료도 주게 되었다. 어미는 몸 전체가 검정색이어서 까망이, 새끼는 세 가지 색이어서 삼색이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미국 오리건주의 작은 도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던 해리 홀트와 간호사 버사 홀트 부부는 1954년 우연히 마을 고등학교 강당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잃어버린 양’이라는 기록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는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시가지 모습과 전쟁고아들에 관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내용이었다. 부부는 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서 충격을 받아 어린 고아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었다. 처음엔 한국에 후원금을 보내다가 결국 입양을 결심하고, 딸 말리를 데리고 1956년 한국을 방문한다. 말리는 6남매 중 셋째로 당시 오리건 대학 간호학과를 갓 졸업한 21세의 꿈 많은 청춘이었다. 말리는 오리건 대학에서 의료공부와 석사과정을 위해 한국을 떠난 5년 외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한국 땅에서 고아와 장애인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 말리가 2019년 84세로 세상을 떠난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말리 홀트((Molly Holt, 1935-2019) 여사다.

1950년대 당시 미연방법은 2명 이상의 해외 아동 입양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해리 홀트, 버사 홀트 부부는 각계에 호소하고 의회 앞에서 시위도 했다. 그 결과 연방 하원은 입양 고아의 숫자 제한을 완화하는 ‘전쟁고아 구제를 위한 특례법’을 1955년 제정한다. 이른바 ‘홀트 법안’이다. 법안 통과 직후 말리 홀트 부모님은 한국에서 갓난아이에서 세 살 반까지 아동 8명을 데리고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한다. 그 장면은 당시 국제 입양에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던 미국민들에게 가족의 사랑이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해외 입양을 원하는 가정이 늘면서, 그해 홀트아동복지회 전신인 홀트양자회 설립으로 이어진다.

아버지 해리 홀트가 1964년 한국 체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부인 버사 홀트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의 홀트아동복지회와 함께 미국에 본부를 두고, 10여 개국의 지부를 둔 홀트 인터네셔널로 발전시킨다. 그녀는 2000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셋째 딸 말리 홀트도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홀트아동복지회를 이어받는다. 딸 말리는 평생 독신으로 장애인과 고아, 미혼모들에게 헌신했다. 말리 여사는 2012년 골수암 진단을 받고도 자신의 개인 방도 없이, 4명의 장애인과 함께 지내며 투병과 헌신의 삶을 살다, 2019년 8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해리 홀트, 어머니 버사 홀트와 함께 말리 홀트 여사도 현재 홀트아동복지회가 있는 일산 한국 땅에 안장되었다.

국내외 빈곤 장애아동들의 지원기관인 밀알복지재단 이사장을 지냈던 손봉호 전 서울대 교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저서에서 사랑을 크게 에로스(eros)와 아가페(agape) 사랑으로 구분한다. 에로스 사랑은 이유가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어떤 이유 ‘때문에(because of)’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어떤 이유가 있거나 마음이 끌려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사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때문에’ 사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구분한다. 어떤 여인이 매력적이고, 꽃이 아름답고, 고양이가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에 사랑하면 그것은 에로스 사랑이다. 에로스 사랑은 수동적이고 이유가 있는 사랑이다. 에로스 사랑은 명령할 수 없다. 호박꽃을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도 없고, 길고양이를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도 없다. 에로스는 주로 감정적이고 정상인이라면 누구든지 어느 정도의 에로스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능동적이다. 어떤 이유가 있거나 마음이 끌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아가페는 능동적이기 때문에 감정적일 수 없다. 전 인격이 관계되고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가페 사랑은 명령할 수가 있는데 의지가 작용하기 위함이다. 사랑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원수는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다.

길고양이는 주는 밥은 와서 먹지만 절대 자기의 곁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내밀면 바로 도망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생명에 대한 긍휼지심(矜恤之心)으로 아침저녁 “삼색아! 까망아!”라고 불러 밥을 주곤 한다. 몰리 홀트여사 부모님과 몰리 여사 역시 전쟁고아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명 사랑으로 발현되어, 당신들의 평생을 낯선 타국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보내고 이 땅에 묻혔을 것이다. 새해에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서로에 대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저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듦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지’ 하는 달빛처럼 아름다운 한 해를 만들어 가기를 소망해본다.

오진곤(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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