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음의 미학

짧음의 미학

  • 기자명 오진곤 교수
  • 입력 2023.01.0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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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명장 테렌스 맬릭(Terrence Malick) 감독의 작품 중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이라는 작품이 있다. 1978년 미국 작품으로 리처드 기어와 브룩 아담스가 주연한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린 듯한 영상과 그러한 영상들을 강조하는 듯한 영화음악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은 작품이다.

전체 95분 분량 중 영화의 전반부 1시간 내내 실내 장면이 거의 없이 끝없이 펼쳐진 텍사스 초원의 황량함과 아름다움을 화면 가득히 보여준다. 영화는 장면의 많은 부분을 태양이 거의 없는 새벽과 황혼 무렵에 촬영하였다.

2021년 9월 9일 태안군 소원면 법산리라는 갯마을에 집을 마련하였다. 작년 2월 대학 정년 후 남은 시간들을 보낼만한 곳을 찾다가, 결국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다들 그곳에 무슨 연고가 있는지 묻지만 연고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갯마을이다. 만리포해수욕장에 서울여대수련원이 있어 만리포를 가끔 방문하긴 했지만 은퇴 후 법산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다. 다만 서해안 일몰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 저리게 한다는 사실 말고는.

아침이면 만보 정도 되는 갯마을을 한 바퀴 돌고, 해질녘이면 어김없이 바닷가 둑방길을 찾은게 1년이 훌쩍 지나 두 번째 겨울을 법산리 갯마을에서 보내고 있다. 겨울이면 바닷가 매서운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지만 해질녘 바닷가 둑방길을 걸어보지 않는 사람은 왜 그 낯선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련히 먼 어린 시절 신안군 지도면 증도초등학교 근무하던 부친을 따라 몇 년을 섬에서 초등학교시절을 보냈던 그 바닷가를, 어른이 된 후에도 꿈속에서 놀던 그 풍광을, 지금은 현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또한 꿈만 같다.

서해안 일몰은 정말 아름답다. 이곳에 이웃들이 있다.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물으면, 모두 서해안 일몰 때문이란다. 대한민국 이곳저곳 다 다녀보았는데 이곳의 일몰을 보는 순간 그냥 오게 되었단다. 천체망원경을 지닌 젊은 부부도 세상에 이처럼 예쁜 풍광을 매일 보고 싶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해질무렵 둑방길을 걷노라면 발걸음이 자꾸 떨어지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지는 해를 다시 돌아보고, 또 걷다가 다시 돌아보기를 수없이 반복해야만 어스름 즈음에 집 마당을 들어서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세월이 빨리 간다고들 한다. 60이면 시속 60km로, 70이면 시속 70km로 간다고들 농담처럼 말한다. 그렇다. 영화를 보면 코미디 같은 경우 속도를 빨리해서 인물들의 움직임을 우습게 표현하기도 하고 멜로 드라마 같은 경우 두 남녀의 만나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영화기법들을 나이가 들면 왜 세월이 빨리 가는가로 적용해 설명할 수가 있다. 영화의 필름은 1초에 24프레임으로 촬영한다. 그러면 인간의 눈은 정지된 영상 24장을 1초에 보면서 착시현상을 일으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낀다. 그런데 1초에 24장보다 더 많은 50장 100장으로 촬영하여 정상속도인 24프레임으로 영사하면 슬로우 모션(slow motion)이 된다. 반대로 1초에 24장보다 적은 12장이나 8장을 촬영하여 정상속도로 영사하면 패스트 모션(fast motion)이 된다.

이것을 인간의 활동에 적용하면, 젊은이들은 에너지가 충만하여 활동량이 노인들보다 훨씬 많다. 즉 같은 24시간이라도 하루를 48시간 72시간처럼 사용하다 보니 하루가 슬로우 모션처럼 길게 느껴진다. 반면에 에너지가 적고 활동량이 적은 노인들은 한 두가지만 해도 24시간 하루가 벌써 지나간다. 즉 패스트 모션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활동량이 적은 나이가 될수록 그 심리적 시간은 영화의 패스트 모션처럼 빨리 지나는 것이다.

장모님이 화초를 좋아해 난을 많이 가꾸셨는데 “오 서방 베란다 난 꽃 좀 보소. 꽃이 참 예쁘게 피었네” 그 말씀을 하셔야만 겨우 꽃을 볼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 천지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가 야생화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내가 태안의 법산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교사 은퇴 후 서울에서 지내던 누이도 한 두번 와 보더니 한 달 만에 서산 한내울이라는 전원주택 단지로 이사했다. 올해 104세이신 우리 어머님과 갑장인 김형석 교수께서도 70이 지나야만 인생을 알고, 그때부터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을 보면 인생의 황혼을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 계절을 나에게서 볼 수 있으리(중략)/나에게서 그대는 보리라, 그런 날의 황혼을(중략)/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서/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불꽃을(중략)/이 모든 것을 알지만 그대의 사랑은 더 깊어지네/곧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네”

시인은 인생의 마지막 여정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다 시의 마지막 2행에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사랑을 더 강하게 한다고 말한다. 상실로,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에 사랑이 더 강해진다. 이것은 많은 문학과 영화 등에서 소재로 삼고 있고 우리 인생 또한 그와 다름이 없다.

영상에서 아주 짧은 시간만을 허용하는 황금시간대 그림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하루 마무리 시간인 황혼이 그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그 시간이 길지 않고 짧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이 아름다운 이유도 그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 빛나는 세상을 볼 수 있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더 많이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 해를 시작하는 소망이 넘치는 시간에 한해가 벌써 다 지나고, 또 다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매직 아워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길 소망해 본다.

오진곤(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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