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0년 스토리] ③ 비뚤어진 ‘팬심’, 야구장 방화·난동 사건사고

[프로야구 40년 스토리] ③ 비뚤어진 ‘팬심’, 야구장 방화·난동 사건사고

  • 기자명 설재혁 기자
  • 입력 2022.08.03 10:47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40주년을 맞이한 국내 최고 인기 프로스포츠로 자리 잡은 한국야구는 인생으로 치면 불혹(不惑)의 나이다. 프로야구는 40년 동안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고 수많은 스타들과 이야기, 그 속에서 역사를 쌓고 있다. 40년 동안 프로야구는 어떤 스토리를 쌓아왔을까. 데일리스포츠한국이 한국프로야구의 원년과 초대 구단들의 변천사, 진기록과 사건·사고, 10개 구단 이미지와 구장별 특징을 전한다. (편집자 주)

1986년 10월 22일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이 해태에 5-6으로 역전패를 당하자 극도로 흥분한 대구 관중들이 해태 구단 버스를 방화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6년 10월 22일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이 해태에 5-6으로 역전패를 당하자 극도로 흥분한 대구 관중들이 해태 구단 버스를 방화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데일리스포츠한국 설재혁 기자] 1980~1990년대, 텃세 응원이 기승을 부렸다. 1986년 10월 22일 삼성 라이온즈의 대구 관중들은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해태 구단 버스에 보복 방화를 저질렀다.

삼성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원년 멤버 전원이 국가대표 출신으로 꾸리며 강팀으로 군림했다.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갖췄지만 한국시리즈에 올라만 가면 맥을 추지 못했다. 한국야구 첫해인 1982년에는 OB 베어스에 1승 1무 4패로 막혔고, 1984년에는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벽을 넘지 못하고 3승 4패로 무릎 꿇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은 1985년에는 초장부터 전력 질주, 아예 전후기 통합 1위를 달성해 한국시리즈 자체가 무산됐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무산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나머지 오히려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1985년에 완전 우승을 일궈내긴 했지만 삼성 팬들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갈증은 더욱 부풀었다.

1986년, 삼성은 3번째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해태 타이거즈와 맞섰다. 삼성은 10월 19일 광주 원정 1차전에서 연장 11회 접전 끝에 3-4로 패배했고 20일 2차전(광주)에서는 삼성이 2-1로 이기며 균형을 맞춘 채 대구로 갔다.

10월 22일 3차전. 김시진(4자책점), 진동한이 이어 던진 삼성이 선제점을 뽑고도 5-6으로 역전패를 당해 대구 관중들은 극도로 흥분했다. 삼성이 역전패하자 경기장에 술병과 쓰레기 등을 마구 던져댔다. 양 팀 선수단은 황급히 덕아웃 뒤쪽으로 피신했다.

사건은 경기가 끝난 밤 9시 45분께 터졌다. 2000여 명의 관중은 대구시민구장 밖에 세워뒀던 해태 구단 버스를 에워싸고 누군가 돌을 던져 앞 유리창을 깼다. 뒤이어 불을 질렀다. 해태선수단의 리무진 버스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전소됐다. 방화 직후 소방차가 출동했으나 바리케이트까지 친 과격 팬들의 저지로 접근조차 못했다. 

난동 관중들은 밤 11시까지 출동한 경찰과 대치했다. 관중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 진압에 나선 다음에야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기장 관리실로 대피, 1시간 이상 갇혀 있었던 해태 선수단은 밤 11시 5분께 경찰이 내준 버스로 숙소인 수성관광호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구 북부경찰서는 난동 관중 일부를 현장에서 연행·조사를 했다.

1988년 5월 31일 부산 사직구장 관중의 빈병 투척으로 덕아웃에서 대기하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1988년 5월 31일 부산 사직구장 관중의 빈병 투척으로 덕아웃에서 대기하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부산에서는 롯데의 역전패 충격으로 관중 쇼크사와 관중들이 마구 던진 빈 병에 12명이 다치는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한국 프로야구 창단 구단인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는 초창기부터 제과업계의 라이벌로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응원 관중들도 두 팀 간의 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88년 5월 31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렸던 해태와 롯데의 경기에 2만 7000명의 많은 관중이 들어찼다. 이날 경기에서 롯데는 8회 말에 7득점을 올리며 8-4로 승리를 눈앞에 두었으나 9회 초에 해태에 5점을 내주며 8-9로 역전패했다.

노상수를 선발로 내세운 롯데는 3회까지 6-1로 경기 흐름을 주도했다. 그러나 4회에 해태가 김성한의 2루타와 김준환의 2점 홈런으로 노상수를 마운드에서 끌어내렸고, 이어 나온 김응국이 김종모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아 1-4로 전세가 뒤집히자 관중석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롯데가 5회 말 공격에서 무기력하게 3타자가 범타로 물러나자 관중석에서 빈 병이나 깡통이 그라운드로 날아들어 잠시 경기가 중단됐다. 급기야 6회 말에는 롯데 김민호의 타구를 해태 중견수 이순철이 담장 바로 앞에서 잡아내자 그의 주변에 빈 병과 깡통이 우수수 쏟아져 경기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장내 방송을 통해 자제를 호소하는 등 소동을 수습하고 경기 중단 9분 만에 가까스로 경기는 속행됐으나 해태가 득점 기회를 잡을 때마다 빈 병 투척 등 소동은 계속됐다.

결국 해태 승리로 끝나자 관중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그라운드는 온통 빈 병과 깡통, 오물 등으로 뒤범벅이 됐다. 양 팀 선수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아 간신히 피신했다. 혼돈의 상황에서 역전패에 충격을 받은 이 아무개 씨는 쇼크로 사망(급성신부전증)하고 관중들은 빈 병 투척으로 12명이 다쳤다.

KBO는 관중 사망 사고까지 빚어지자 6월 1일 이웅희 KBO 총재가 ‘관중난동 방지를 위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에는 “최근 빈발하고 있는 프로야구 경기장 관람 질서의 극심한 해이는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며 조치 가능한 사항을 언급했다. 즉 관중난동이 발생할 경우. 홈팀과 전혀 관계없는 제3의 구장으로 장소 변경과 무기한 경기 중단, 관중을 입장시키지 않고 경기를 한다는 것 등이었다.

1990년 8월 2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LG와의 경기에서 벌어진 최악의 관중 난동사건.
1990년 8월 2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LG와의 경기에서 벌어진 최악의 관중 난동사건.

도를 넘어선 관중 소란은 사직구장 관중 사망을 계기로 진정 추세에 접어들었다. 관중 쇼크사 이후 2년 뒤 사상 최악의 관중난동이 벌어졌다. 1990년 8월 26일 밤, 잠실구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특히 잠실구장 난동은 원정팀 해태 타이거즈 응원 관중에 의해 사건이 촉발됐고, 사회 문제로 비화됐던 대형 사건이었다.

1990년 해태와 LG 두 팀은 새로운 라이벌로 떠올랐다. 두 팀의 주말 경기는 연일 매진되며 팬들의 관심도는 매우 높았다. 시즌 양 팀 간 마지막 경기인 8월 26일에 3만 100명의 관중이 모였다. 

경기는 5회까지는 양 팀 선발 신동수(해태)와 김용수(LG)의 호투로 팽팽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LG가 6회에 3점, 7회에 7득점을 올리며 승부가 기울어졌다. 

사건은 8회 초 해태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인 밤 9시 12분께 터졌다. 3루 측 해태 응원 관중이 그라운드로 뛰어들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500여 명의 관중이 그라운드를 점거했다. 관중들은 그라운드 안에서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일부는 베이스와 외야 펜스 광고 부착물도 떼 냈고 불까지 질렀다. 

이에 LG 응원 관중 한 명은 뛰어 내려와 철제 의자로 해태 응원 관중의 머리를 내려친 것을 신호로 양쪽 관중이 서로 뒤엉켜 그라운드 안팎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빈 병이나 깡통에 얻어맞은 부상자도 속출했다. 마치 전쟁터의 폐허를 방불케 했다. 3루 쪽 관중석 의자 등받이가 100여개 파손되는 등 기물 파손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날 난동은 경기중단 36분이 지난 밤 9시 46분께 무장경찰 3개 중대가 투입돼 그라운드의 관중들을 내몰아 가까스로 수습됐다. 경기는 1시간 7분간 중단됐다가 밤 10시 19분에 속개돼 13-1로 LG가 이기고 밤 10시 30분에야 끝났다. 

관중난동의 후폭풍은 거셌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27일 경기장 폭력 사태 근절을 안응모 내무부 장관에게 지시했고, 김기춘 검찰총장과 이종국 치안본부장도 경기장 내 폭력행위 엄단과 주동자 전원 구속 방침을 전국 검찰과 경찰에 내리기도 했다. 

잠실구장 관할 강남경찰서는 난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검거, 형사 처벌 방침을 세우고 현장에서 연행한 난동자들 가운데 19명을 28일에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결국 경기장 난동자들에게 첫 실형이 선고됐다. 경기장 난동 관중에게 중형을 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울형사지법은 10월 31일 잠실구장 폭력 사태에 연루돼 구속돼 있던 11명의 관중들에게 징역 1년 6월~1년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했다.

과거 대전구장의 '언어폭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시 상대 선수나 감독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행태가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2006년 10월 26일 삼성과 한화의 한국시리즈 4차전이 펼쳐졌다. 경기는 삼성의 4-2 승리로 끝나면서 한화가 홈에서 2연패를 당해 7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멀어졌다. 

사건은 이날 경기 직후 감독 인터뷰 때 일어났다. 패장인 한화 김인식 감독이 먼저 인터뷰를 위해 덕아웃을 떠나 그라운드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 연패로 우승이 멀어져 화가 난 한화 측 관중석에서 육두문자가 섞인 "김인식 XXX~"가 두세 차례 반복됐다. 불편한 발걸음을 멈춘 김 감독은 구겨진 표정으로 고개를 관중석 쪽으로 돌렸다. 한화 관계자가 관중석을 향해 해당 관중을 제지하고 나서야 겨우 상황은 일단락됐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 경기장에서 난동을 찾아보기 힘들다. 각 구단들은 빈 병 투척을 막기 위해 입구부터 병에 든 음료와 도수 높은 술을 제재했다.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관중들은 진정으로 팀을 응원하고 있다.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선수의 이름을 외치며 하나 된 응원을 하며 진정으로 팀을 응원하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