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말’로 살펴본 대선 이야기

<김성의 관풍(觀風)> ‘말’로 살펴본 대선 이야기

  • 기자명 김성 소장
  • 입력 2022.02.1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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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정가에는 유난이 ‘말’이 많다. 특히 선거때가 되면 온갖 말이 쏟아져 ‘말의 성찬(盛饌)’이라고도 했다. 선현들은 말이 행동의 거울이자 인생과 같다고 했다. 칼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라고도 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설화(舌化)를 가져올 수 있어 생각보다 앞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정의화 전 의장 벽에 ‘忍’ 글자 걸어놓고 언행에 신중

19대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정의화 의장은 의장실 맞은편 벽에 참을 ‘인(忍)’자를 걸어놓고 말조심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같은 집권 새누리당이면서도 박근혜 대통령과 정치동지적 관계가 아니었던데다 당시에 세월호 사고, 대통령의 정부안(案) 통과요구, 보수개혁을 지향했던 유승민 원내대표 끌어리내기, 가장 긴 필리버스터 등 정치 현안이 끊이지 않았다. 하여 말 한마디가 국회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야소통을 위해 거친 말을 참으면서 국회를 운영해보자는 뜻으로 걸어 놓았던 것이다.

20대 대선에서 4명의 유력 후보 가운데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만 처음 출마한 까닭에 아무래도 ‘말실수’가 많았다. 윤 후보는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으로부터 ‘망언’이라는 비판을 자주 받기도 했다. 2021년 10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얘기하는 분이 많다. 호남분들도 그런 얘기하시는 분도 꽤 있다”고 말해 비판이 쏟아지자 일단 사과를 했다. 하지만 SNS에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 ‘개 사과’ 논란이 뒤따랐다. 민주당 대선후보 이재명은 “사과에 진정성을 가지려면 경징계했던 ‘5·18 망언 3인방’을 조치해야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후보의 발언, ‘말실수’일까? 의도된 외연확대일까?

이밖에 “극빈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 자유가 뭔지도 몰라”(2021년 12월), “80년대 민주화운동 하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그 민주화운동이 그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한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어디 외국에서 수입해 온 이념에 사로잡혀서 민주화운동을 한 분들과 같은 길을 걸은 것”(2021년 12월)이라는 말로 비난을 받았고, “현 정부가 중국편향 탓에 청년들이 중국을 싫어해”라고 해 “국경을 넘는 망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또 “북한의 도발 조짐 있으면 선제타격을 하겠다”(2022년 1월)고 하여 집권 민주당으로부터 “대통령 후보로는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1991년에도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 선제공격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으로부터 “화해를 추구하는 현 남북관계를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중대 망언”이라는 맹공을 받았었다. 최근에는 “집권하게 되면 현 정부의 적폐를 수사하겠다”고 하여 분노한 청와대가 직접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 윤 후보의 발언이 말실수였는지, 외연을 확대하려는 의도된 발언이었는지는 선거 이후 밝혀질 것이다.

김영삼정부때부터 ‘말의 자유’ 시대 열려

엄혹한 군사정권 시대를 지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말의 자유’ 시대가 열렸다. 1990년 1월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이끌던 정당들이 인위적으로 합당하여 거대 집권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으나 ‘내각제 합의’라는 이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95년 2월 김종필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1993년 14대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영남출신 군(軍)장교 모임인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전·노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집권당의 이름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3차례에 걸친 대선에서 패한 뒤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2년이 넘는 영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1995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렇게 하여 ‘3김시대’가 다시 열렸다. 집권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50%에 육박하자 김대중은 1997년 11월 3일 공개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면서 정치성향이 전혀 다른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다. 그리고 이 해 12월, 외환위기 등으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호(號)를 구출할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사실상 첫 정권교체에 성공한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명칭은 ‘DJP연합’ ‘DJP공동정부’로 불리게 됐다.

박지원 “자기는 돼지 잡아먹어 놓고 족발 하나 먹은 우리만 잡아넣는다”

나중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공작으로 밝혀졌지만 DJP공동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김대중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은 끈질기게 계속됐다. “세대교체보다는 우선 성씨(姓氏)교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1996년 6월) “시 프린스號의 기름유출이 남해안의 생태계를 파괴했듯 3김시대의 재출현은 인간생태계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1995년 7월 이기택 민주당 총재) “다른 나라와 달리 여당이 개혁과 세대교체를 요구하고 있는데 반해 야당은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한국정치의 특징이다”(1995년 8월 이홍구 국무총리) 등의 견제구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은 “다음 선거에 놀랄만한 젊은 후보를 선출하겠다”고 까지 밝혔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젊은 리더로 케네디가 있었지만 드골과 닉슨 같은 올드 리더도 있었다”고 반격했다. 또 여러 정치 사안에 대해 김대중 책임론이 제기될 때마다 “3김이 똑같이 책임지란 말을 거부한다. 나와 김종필 총재는 피해자다”고 했고, “양당이 한 배를 탈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르겠는데 이 배의 이름은 DJP호로 마지막 귀항지는 정권교체다”(1996년 6월 국민회의와 자민련 합동의총에서 조찬형 의원)며 1년 전부터 DJP연합에 공을 들였다. 물론 여기에 대해 집권 신한국당은 끊임없이 “DJP공조란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세자빈이 이혼하기로 일찌감치 결심해 놓고 각종 행사에 함께 참석했던 것과 같다”(1997년 6월 강재섭 의원)고 비판했다. 국민회의쪽에서는 2001년 8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 표결때도 “공조의 정신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돕는 것”(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이라고 했으나 자민련이 야당과 함께 해임안에 찬성함으로써 공동정부는 막을 내렸다.

1995년 대선자금 수수설이 정가에 나돌자 김대중은 “괴문서에는 내가 포철에서 150억원을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150원도 받지 않았다”(1995년 8월)고 반박했고, 국민회의 박지원 대변인은 “자기들은 돼지를 잡아먹으면서 족발 하나 먹은 우리만 잡아넣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나중에 김대중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내가 20억원을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을 당시의 상황으로는 양심상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양심에 어긋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시인하면서 정면돌파했다.

당시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모두 뇌물로 규정했으나 민자당에 준 총선지원금과 당운영비 등이 2,000여억원에 이른데다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총재의 선거자금까지 조사가 불가피해지자 이 부분을 덮었다. 검찰은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의 고소사건에 대해 처음에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그제서야 두 사람을 구속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때 검찰 조사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권력의 시녀”라는 이름이 붙었고, 끊임없이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됐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30년 묵은 과제들

우리 정치 과제들 가운데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게 많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기(청와대)에 있으니 세상을 모르는 것 같아 세종로나 과천청사에 자주 나가고 국민들의 얼굴을 자주 봐야겠다”(1998년 2월 취임직후)고 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세종로 청사 근무를 공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윤 후보 역시 같은 공약을 내세웠는데 실현여부가 주목된다. 정치가 중앙정치 중심으로만 진행되자 “중앙정치세력들이 지방정치를 도구화해 지역일꾼보다 자신들의 대리인을 내세우고 있다”( 1998년 서울대 안청시 교수) 지적했으나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치에서 소외된 젊은이들도 끊임없이 정치변화를 주장해왔다. 김영삼 정권때 ‘PK’를 가르켜 “20세기 후반 한국에서 유행한 골품(骨品)제도. 일반적으로 부산·경남 출신을 말하나 경남고 출신은 성골이라 하여 검찰·경찰·법무부 등의 요직을 차지함”(1995년 서울대 대학신문)이라고 비꼬았는데 이런 지역주의·계층주의가 언제 해결될지 모르겠다. 또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는 토지소유자들의 천국이다. 그린벨트를 해제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전국을 그린벨트화 하자. 토지이용은 재산권의 행사가 아니라 국토의 차용 아닌가” (1998년 서울대 대학신문)라고 외쳤으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김성(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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