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언롱인(言弄人)’을 나무라던 리영희선생 10주기에

<김주언 칼럼> ‘언롱인(言弄人)’을 나무라던 리영희선생 10주기에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20.12.03 10:20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어 그것에서 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사람의 소유물일 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사상의 은사’로 불리는 리영희선생이 생전에 남긴 글의 일부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날(5일)을 맞아 다시 선생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타계 10주기를 맞아 평전과 선집이 나란히 나왔다. 평전 ‘진실에 복무하다’와 선집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이다. 평전은 구속과 해직을 당하면서도 거짓의 빗장을 풀기 위해 굽히지 않은 선생의 지적 실천적 여정을 담았다. 선집은 선생이 생전에 출간한 20여권에 담긴 글중 22편을 엄선해 모았다. 리영희사상의 줄기를 더듬어볼 수 있는 대표작과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을 선정했다.
선생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준 선지자였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선생이 던진 화두는 의식의 전환이었다. 민주화 열망만으로 독재정권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젊은이들에게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의식의 힘이 총칼보다 강함을 보여주었다. 잇달아 출간된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매몰됐던 반쪽이성을 찾게 해주었다. ‘패망한 베트남’은 ‘통일된 베트남’으로 제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선생의 세계관이 젊은이들에게 스며드는 계기였다. 
선생은 ‘사상의 스승’ 이전에 ‘참 언론인’이었다. 선생은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용의주도하고 냉철한 데스킹으로 기자들을 압도했다. 후배 신홍범은 리영희부장은 “준엄하고 치밀하고 섬세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외신부에는 리부장과 뜻을 같이하며 베트남전쟁을 다뤄나갈 기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중견기자는 물론, 수습을 뗀 김대중(조선일보 전주필)조차 뒤에서 비아냥거렸다. 외신면 편집기자였던 허문도(전두환정권 청와대 공보비서관)도 자주 충돌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 등 해외인사들의 발언을 활용했다.
선생은 현역 언론인 시절 직필을 택한 대가로 독재정권의 폭압에 시달렸지만 소신을 저버린 적이 없다. 온갖 필화사건으로 몸이 피폐해지더라도 ‘참 언론’을 소중하게 지켰다. 선생은 연행5회 구속5회 기소4회, 세번에 걸친 징역과 해직 해고를 경험했다. 기자시절에는 민감한 기사를 쓴 다음에는 반드시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 연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기 때문이다. 후배 언론인들은 이러한 선생을 회고하며 ‘기자의 혼’을 되새긴다. 
미디어환경은 선생 타계 이후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충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사익추구에 매몰돼 있는 언론계에 따끔한 일침을 남겼다. 언론사주는 물론, 권력에 아첨하며 곡필을 휘두르는 사이비 언론인에 대한 비판은 정곡을 찌른다.  양심을 팔아 부와 권력을 탐하는 곡필 언론인이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선생은 ‘언론사 또는 언론인’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단지 ‘보도기관’과 ‘보도기관 종사자’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언론사와 언론인은 피를 먹고 자라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회구성원들의 생각과 견해의 자유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히려 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고 권력논리만 전파하는 데 급급했던 그들에게 결단코 ‘언론’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할수 없었다.
선생은 ‘기자풍토 종횡기’라는 글에서 언론타락상의 근원과 문제점을 풍자적으로 비판한다. 기자들을 ‘이완용기자’류와 ‘홍경래기자’류로 대비한다. 결론은 언론인은 없고 ‘언롱인(言弄人)’만 남았다는 비판이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권력에 기생하고 약자에게는 군림하며, 갈수록 지성은 퇴보하여 ‘조건반사적 토끼’가 된 기자군상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다. 이른바 ‘기레기’ 원조들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기자가 마련하지 못한 것을 민중이 스스로 쟁취하려 하고 있다”는 선생의 일갈은 혹독하고 뼈아프다.
선생은 한국의 언론이 반통일적 반인민적 반민주적 세력들과 공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사주들뿐만 아니라 기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기자들을 향한 충고는 신랄하다. “괴로움이 없어요. 어려운 시대, 특히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인 기자들이 괴로워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천착하려는 노력과 의식이 없다”며 “이익집단의 파수병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기자사회 풍토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더 악화하지는 않았는지. 
필자는 23년전 선생의 자택에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다. 산본 수리산 기슭에 있는 자택에서였다. 온화한 얼굴이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저널리스트들이 사회적 전망이나 지향에 너무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 자유 개인, 사회의 창의력 등을 가로막는 비인간적 기제들과 싸울 것을 권합니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수탈하는 것들과 투쟁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자들은 인간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반인간적 행위와 정책이 있다면 그것에 대항하고 깨우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일깨움은 오늘의 기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자는 국가나 이념 등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세심하게 인간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깨우침이다. 인간의 구체적 행복에 초점을 모아야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사상이 없는 지식’은 키가 없는 모터보트와 같지만, 반대로 ‘지식이 없는 사상은 정견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비유했다. 지식을 갖되 사상적 지도를 받아야만 ‘완결한 저널리스트’로 자리할수 있다는 것이다. 진영논리에 매몰되거나 맥락없는 정파싸움만 중계하는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서 선생의 혜안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닿는다. 
리선생은 댁에 찾아가는 제자와 후배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 어려운 걸음으로 아파트 문을 나서 어렵사리 승용차에 올랐다. 거동이 어려운 데다 손목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지만, 후배들을 뒷자리에 태운 채 스스로 운전대를 잡았다. 산본저수지 근처의 허름한 매운탕 집에서 막걸리 잔을 돌리며 세상살이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아닌 리영희의 ‘주막수훈’이라고나 할까. 때로는 오리고기집을 ‘개발’했다며 함께 몰려가 포도주를 곁들여 훈제오리를 들었다. 그러곤 흘러간 옛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선생을 생전 마지막으로 뵙던 날. 10월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선생은 신촌의 아들집 정원에 앉아 후배들과 덕담을 나누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해 병원에서 복수를 뺀 뒤 힘든 몸으로 나온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한이 없네. 마지막까지 제자들과 후배들이 찾아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선생님의 기(氣)가 전해져 왔다.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의 원리가 아닐까?” 선생이 타계한 지 10년만에 되뇌어보는 선생의 금언이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