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원 칼럼] 잊지 말아야 할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고통과 투쟁

[지재원 칼럼] 잊지 말아야 할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고통과 투쟁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11.27 22:52
  • 수정 2019.11.2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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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유원호 선생(89)이 타계했다. 김녹영 국회부의장 비서실장 등을 지낸 정치인이지만 그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문익환목사는 김일성주석과 2차례 회담을 갖고 합의문까지 발표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엄청난 사건이었다.

열흘간 북한방문을 마치고 4월13일 귀국하기 전 문목사 일행은 며칠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이때 동아일보 출판국 소속 기자(월간멋)였던 필자는 도쿄에서 취재중이었는데 서울 본사의 신동아 편집실에서 긴급 취재협조 연락이 왔다. 문목사와 동행한 유원호씨를 인터뷰하라는 것이다. 일정상 서울에서 신동아 기자가 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모든 언론은 문익환 목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상대적으로 유원호씨는 관심권 밖이었다.

문목사 일행은 도부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의 경호가 안팎으로 삼엄했다. 그들의 숙소가 있는 호텔 10층은 엘리베이터도 서지 않았다. 경찰 입회하에 직원이 수동으로 작동해야만 10층에 내릴 수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유원호씨는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귀국하면 곧바로 공항에서 체포될텐데, 그러면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할 수 없지 않느냐면서 거듭 요청하자 ‘일본 기자가 입회하면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한국 기자는 기사를 어떻게 왜곡할지 모른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당시 재일 르포라이터로 활동하던 유재순씨를 통해 인사를 나눈 바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게 부탁했다. 연세대 어학당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아사히신문 국제부에 있을 때였다. 자사의 취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에무라 기자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고 덕분에 인터뷰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교분이 이어지게 됐으며 그가 일찍부터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서울특파원과 평양특파원을 하는 것이 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해 가을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 사회부로 옮긴 우에무라 기자는 2년뒤인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씨의 육성 증언을 최초 보도함으로써 한일 언론계뿐 아니라 역사학계에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언론인으로서는 역사적인 특종을 한 셈인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이것이 우에무라 기자에게는 길고 긴 고통의 출발점이 된다.

도쿄기독교대학의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는 1992년부터 우에무라 기자의 김학순 증언보도가 ‘날조’라고 우기면서 온갖 매체를 통해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하고 <이해하기 쉬운 위안부 문제>(2007), <알기 위한 위안부 문제>(2012) 등 책까지 펴내 ‘우에무라 공격의 선봉장’으로 나선다.

우에무라 기자가 50대 중반에 언론인 생활을 청산하고 대학교수로 전직을 시도할 무렵인 2014년 1월말, 일본의 주간지 <슈칸 분슌>에서 니시오카의 코멘트와 함께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의 여자대학 교수로”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그가 교수로 취임하기로 결정된 고베여자대학에 항의메일이 빗발쳤고, 강단에 서보기도 전에 그만둬야 했다.

특종보도 23년만에 우에무라 기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의 타깃이 되면서 본의아니게 위안부 문제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른다. 이때부터 본인은 물론 10대의 여고생 딸까지 신상털이와 함께 살해협박까지 당한다.

우에무라 기자도 더 이상 참지 않고 <슈칸 분슌>과 니시오카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으로 맞선다. 법원으로부터 “날조기자가 아니다”라고 인정받는 것이 ‘무고’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공격은 그가 2012년부터 시간강사로 출강하던 호쿠세이학원대학에까지 이어졌다. 2015년 12월 학장과 이사장까지 나서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에무라를 시간강사로 계속 고용하겠다고 발표하고 계약을 갱신했지만 2016년초, 이 대학에서도 결국 사직해야 했다.

일본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게 된 우에무라 기자를 한국의 가톨릭대학이 초빙교수로 모셔와 2016년 3월부터 한국에서 강의를 이어가게 됐다. 그해 10월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라는 그의 저서 한국어판을 펴냈고, 작년 10월부터는 일본의 진보 매체 <슈칸 긴요비>의 발행인을 맡아 한국과 일본을 절반씩 오가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리영희재단은 언론인이자 진보 지식인이었던 리영희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2년에 설립된 단체다. 이듬해부터 매년 ‘리영희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는데 그동안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김효순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용마 MBC 기자 등 개인과 뉴스타파, 반올림 등 단체가 수상했으며 7회째인 올해의 수상자로 우에무라 다카시 발행인이 선정되었다.

재단측은 “우에무라씨의 투쟁은 단순히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론 자유를 지켜내는 노력”이라며 “일본 양심세력과 연대하는 의미도 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우에무라 발행인은 “일본에서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마음대로 날뛰고 행동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를 직시하려는 여러 가지 움직임에 공격을 하고 있다. ’우에무라에 대한 공격‘은 저의 문제만은 아니다”라면서 “응원해주는 한국의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이 수상을 계기로 일본과 한국의 리버럴 세력의 교류가 한층 깊어지기를 바란다”고 수상 소감을 밝힌다.

시상식은 12월4일, 프레스센터에서 리영희선생 9주기 추모행사와 함께 열린다. 우에무라 다케시 기자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본사 전무>

우에무라 다카시 저서 한국어판
우에무라 다카시 저서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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