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원 칼럼] ‘생애 마지막 인터뷰’까지 한 이어령 선생의 가시와 향기

[지재원 칼럼] ‘생애 마지막 인터뷰’까지 한 이어령 선생의 가시와 향기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11.0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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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전인 1959년 경향신문은 20대의 신진 평론가 이어령과 40대의 중견 작가 김동리의 논쟁을 3차에 걸쳐 게재했다. 이 논쟁에서 특히 눈길이 간 것은 김동리가 지성적인 문장이라고 평가했던 소설가 오상원의 작품에 대한 이어령의 평이었다.

 “한마디로 지성적인 문장은 서술이 정확한 문장이다. 그런데 상원씨는 ‘그’라는 지시대명사도 옳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 또 형용사나 관용사 그리고 부사의 사용과 그 위치까지도 잘 모르고 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성적인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국어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나라 말을 모르고 있다.”

오상원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를 거쳐 동아일보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지낸 소설가다.

 이어령의 비평에 대해 김동리가 “비평가의 글이 더 생경하다”면서 이어령이 발표했던 글들의 문장을 문제삼자 이어령은 “(논쟁에서 문제제기한 부분에 대해)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고 다시 내 글만 가지고 논의한다면 씨와 한잔의 술은 나눌지언정 결코 문학에 대해선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씨의 소설과 내 문장의 콤마 하나와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일갈한다.

 이어령의 한국문학에 대한 공격성은 대학(서울대 국문과)을 졸업하던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쓰면서 이미 주목을 받았다.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병주는 그 글을 본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가 ‘우상의 파괴’를 들고 문학계에 등장했을 때 모두들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거의 반신(半神)쯤으로 되어 있는 김동리 선생은 ‘미몽(迷夢)의 우상’이라고 하고… 황순원, 조연현, 염상섭, 서정주씨 등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한 비평을 가했다. 실로 맹랑한 문제아의 출현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시골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문제아야말로 한국에 현대문학을 가능케 할 길잡이가 될 것이란 사실을.”(이병주 <지성채집> 중에서)

 이어령은 1968년 시인 김수영과 5차례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통해 또한번 한국문단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참여문학의 대표 시인 김수영에게 “최근 김수영씨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문학 비평가들이 참여라는 이름 밑에 문학 자체의 그 창조적 의미를 제거해버렸다”면서 “불온성을 작품의 가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김수영씨같은 시인에게  문학비평가의 월평보다 기관원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품명을 훔쳐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일 것이다”라고 혹평했다.

 지난해 이어령은 “김수영 50주기를 맞아 원고 청탁을 받고 기뻤다”면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될지 모르지만 많이 손상되고 왜곡되어 오해의 켜가 쌓인 선생과의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본격적인 김수영론을 완성할 것을 다짐한다.

 50주기 헌정 산문집 기고문에서 이어령은 “김수영에게 시는 자유요 그 자체였다”면서 “우리 문학이 구축해왔던 담론적 대립쌍들 참여/순수, 리얼리즘/모더니즘, 근대/탈근대, 소시민/민중 등의 구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해석 코드를 끊임없이 제공해주는 원천”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50년 전의 가시에 향기가 더해진 평가로 보여지는데, 이 선생의 다짐대로 ‘본격적인 김수영론’이 나온다면 그 완성본을 보게 될 것같다.

 지난 10월19일 조선일보는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란 제목으로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지나놓고 보니 마지막 인터뷰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생전의 인물 인터뷰에 ‘마지막’이란 수식어가 붙어 숙연한 기분까지 들게 한 기사였다.

 7년전, 위암을 앓던 외동딸 이민아 목사는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열정적으로 글 쓰고 강연하다가 53세에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법대를 졸업한 뒤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후 목사가 된 그는, 자폐 아들로 오랫동안 애태우고 25세 된 건장한 장남을 갑자기 잃은 데다 본인도 이혼과 재혼, 실명과 암 발병 등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어려운 이웃과 청소년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은 삶을 살았다.

 아버지 이어령 선생은 딸의 개인적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고, 마침내는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척의 아픔까지도 겪었다.

 50년대에 데뷔해 70년대까지 문학평론을 해온 이어령 선생은 당시의 주요 문학논쟁들을 엮어 책(<장미밭의 전쟁> 2003년)으로 펴냈다. 이 책 서문에서 이 선생은 “장미는 아름답지만 가시가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모양과 향기 때문에 가시는 창이라기 보다 방패 구실을 한다”면서 “논객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코피를 쏟았지만, 그것은 이전투구가 아니라 장미밭의 전쟁이었다”고 술회한다.

 22세에 문학평론가로 데뷔, 26세에 서울신문사 논설위원을 시작으로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여러 매체에서 논객으로 활동하고 1990년엔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는 등 그의 한평생은 한두가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을만큼 화려하고 다채롭다.

 본인도 인정했듯이 논객 시절엔 장미의 ‘가시’였던 그가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의 딸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였다. 자신도 암을 앓고 있으면서도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 마지막 힘을 다해 책을 쓰면서, 죽음까지 기록할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어령 선생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 집도 자녀도 책도 지성도…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이어령 선생은 우리에게, 50년전과 달라진 여러 저작물들을 통해 장미에겐 가시만 있는 게 아니라 향기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가 남겨주는 귀한 선물이다. <본사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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