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한국 학생운동의 전통, 잘 이어가고 있나?

<김성의 관풍(觀風)> 한국 학생운동의 전통, 잘 이어가고 있나?

  • 기자명 김성
  • 입력 2019.10.31 13:59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뿌리가 깊다. 벌써 59년이 지났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서 첫 희생자로 마산의 고등학생 김주열이 나왔으며, 학생들의 분노의 불길로 4·19의거가 일어났다. 1960년대의 한일회담 반대, 3선개헌 반대, 1970년대 유신독재 반대 등의 동력도 학생들로부터 얻었다.

4·19, 5·18, 6·10항쟁 등 학생들이 견인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도 전남대 정문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공수부대의 살인적 진압으로 시민이 합세하는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1987년 대학생 박종철·이한열이 희생된 6·10항쟁에 이어 1997년 5·18의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17년간의 민주화운동이 완성될 때까지 기나긴 시간의 행렬을 끌어 온 힘의 원천도 학생들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힘이 ‘깨어있는 국민’을 만들었고, 결국 국민들의 역량이 결집하여 2017년 촛불혁명을 이루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반대 학생운동은 학생들이 공장으로, 농촌으로 파들어 가 현실을 배우게 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기에는 학생들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가 되어 분단극복, 경제정의, 민중예술 운동을 이끌었다. 오늘날 야당을 포함해 국민 모두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 학생운동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를 진화 발전시켜온 학생운동의 뿌리는 어디일까? 바로 1929년 광주에서 출발하여 전국을 거쳐 해외로까지 확산된 학생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운동 뿌리는 11·3학생독립운동

올해 90주년을 맞았다. 90년 전 오늘,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왕인 명치의 생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어서 학생들이 신사(神社)참배에 동원됐다. 시내로 나온 뒤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붙어 조선인 학생 1명이 일본인 중학생이 휘두른 단도에 부상을 입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광주역에서는 조선인 통학생들이 열차로 귀가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인 중학생들이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있었던 싸움을 분풀이 한다며 몰려들고 있었다. 서로 첨예한 대치를 하던 동안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까지 합쳐 양쪽 학생들이 각각 200명으로 늘어났을 때 패싸움이 붙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1시간동안 싸움이 있은 후 출동한 경찰·소방대원·교사들이 말려 학생들은 일단 학교로 돌아갔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우리의 투쟁사실을 광주시민에게도 알리자며 이날 오후 2시 다시 학교를 뛰쳐나와 일본인 상가가 밀집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는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 광주여고보생들도 참여했고, 광주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당국이 휴교령을 내리자 서울의 신간회와 각 학생단체 대표들이 진상 조사를 위해 광주를 찾았다. 광주청년동맹 회원들과 서울의 학생단체 대표들은 서울에서도 시위를 확산시키자고 합의했다. 광주 장날인 12일, 9시 시작종과 함께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3일 오후 시위로 학생들이 붙잡혀 있는 광주형무소를 향해 전진하였다.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리자 거리의 많은 조선인들이 박수를 치거나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광주의 시위 소식은 일제의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알려져 12월 2일 서울시내 각 학교에 1만매가 넘는 유인물이 뿌려졌고, 15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듬해 1월부터는 신의주, 평양, 함흥, 부산, 진주 등 전국은 물론 중국 간도까지 확산되어 3월까지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백지동맹, 거리 시위가 이어졌다.

320개 학교 참여, 5천명 이상 검거

일제는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있었던 조그만 충돌이 원인인 것처럼 축소보고 하였지만 시위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된 것을 보면 전국의 각 지방이 이미 시위를 한꺼번에 일으킬 수 있는 학생들의 역량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5,000여명 이상이 검거되었는데 4,500여명이 학생이었다. 참여학교도 초·중·전문학교 320개 학교(2006년 광주광역시교육청 조사)에 이르렀는데,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까지 조사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1·3학생독립운동의 의의는 첫째, 3·1운동이 기성세대들에 의해 주도된 것과는 달리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주동이 된 근대사회 최초의 운동이라는 점이다. 학생운동의 주동자들은 옥고를 치른 뒤 상당수가 다시 청년운동과 노동자·농민운동에 뛰어들어 한국 독립운동을 견인하였다. 둘째, 불의(不義)에 항거하는 전통을 세워놓았다는 점이다. 셋째,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러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해방 이후에도 많은 수난을 겪었다.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해방된지 8년만인 1953년에야 국가기념일 ‘학생의 날’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유신독재에 의해 폐지되었다. 1984년 다시 제 1회 학생의 날로 부활됐으나 이때는 ‘독립운동’‘투쟁’ 기념일 성격이 아니라 ‘면학’을 강조하는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2006년에야 가까스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되었지만 교육부가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를 매년 한 군데씩을 돌아가며 기념식을 치르도록 해 ‘망각’을 부채질했다. 2018년부터 대통령 지시로 국가보훈처가 주관하여 성대한 기념식을 갖게 되긴 했지만 일제가 사회주의 운동으로 덧칠하는 바람에 다른 독립운동에 비해 유공자수(212명)가 적고, 무관심 때문에 빈약한 학술연구 실적만 남겼다.

“우리는 피끓는 학생, 바른 길만이 생명”

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운동으로 출발한 뒤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대(大)사회변혁운동이었다. 이제 어떤 운동으로 그 정신을 계승해 갈지 궁금하다.

학생, 그들은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지성, 그리고 다양한 미래관을 가진 세대이다. 그들의 정신은 비록 9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공원에 세워져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의 문구처럼 끊임없이 전승되어 가리라 믿고 싶다.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김성(광주대 초빙교수)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