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원 칼럼] 이규태 칼럼이 그리워지는 요즈음

[지재원 칼럼] 이규태 칼럼이 그리워지는 요즈음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09.25 21:35
  • 수정 2019.09.2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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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칼럼은 보통 2백자 원고지 기준 10매 내외로 짧다. 필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시의성이 있어야 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근거(팩트)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사전준비와 조사가 필수적이다.

짧은 칼럼 한편을 쓰기 위해 몇날 며칠을 준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칼럼 쓰는 것이 직업인 언론인이더라도 보통 일주일에 한편 또는 2~3주에 한편 정도 칼럼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규태 선생은 1983년 3월1일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 첫 칼럼을 시작한 이래 2006년 2월23일까지 만 23년동안 매일 칼럼을 썼다. 마지막 칼럼이 게재된 이틀 뒤 사망했으니,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칼럼을 쓴 것이다. 투병중이던 말년엔 격일 또는 3일에 한번씩 칼럼을 쓰기도 했지만 20년 동안은 휴간일을 제외하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

2006년 2월23일, 마지막 회(6702회)의 제목은 ‘평생 글 쓴 행복한 삶… / 아, 이제는 그만 / 글을 마쳐야겠습니다’였다.

23년동안 매일 칼럼을 연재하고, 사망 직전에 ‘마지막 회’까지 남긴 것이다. 우리 언론사에서 전무하고도 후무한 기록이다.

마지막 칼럼에서 그는 이규태 코너의 성격을 “매일매일 바뀌는 것들을 변하지 않는 과거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미래를 보고자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애초부터 시사적인 사안들을 공시적(共時的) 시각에 머물지 않고 통시적(通時的) 시각과 씨줄날줄로 엮어서 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와 동년배로, ‘이규태 묘비명’을 쓴 동아일보 출신 언론인이자 소설가 최일남 선생은 “신라적 송장까지 때때로 벌떡벌떡 일으켜 세워, 우리에게 주절주절 말을 걸게 만드는” 이규태의 과거에 기댄 칼럼은 “당대의 눈으로 보고 다뤄야 할 사안을 폭 삭은 옛날로 끌고 올라가 연결 규정하는 까닭에 신문의 원천적 구실과는 동떨어진다는 시각이 없지 않다”고 일견 비판하면서도 “그러나 그가 쓰는 칼럼의 긴 생명력의 주된 원동력은 사회부 기자로 있을 때부터 몸에 밴 취재력이나 어지간히 골고루 탐색하고 다닌 해외 견문과 독서, 그리고 소싯적 농촌 체험이다. 이것들이 그때그때의 글줄에 적절히 녹아 남다른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1995년 12월20일, 당시 국정 지지도가 높았던 김영삼 대통령은 이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개각을 단행했다. 현직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이수성)로, 현직 동아일보 사장을 통일부장관(권오기) 등으로 발탁하면서 개혁•전문•참신성을 강화한 내각이라고 자평했다.

이 직후 이규태 코너는 ‘천년인물’이란 제목을 통해 우리 옛 선비들이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선정하는 문화유희인 ‘만고도목’을 소개했다. 만고도목이란 가장 뛰어난 역사인물을 골라 정부 요직에 안배하는 조각(組閣)놀이였다.

“...육당 최남선이 적어 남긴 만고도목에 보면 국무총리는 고구려의 을파소, 육군장관은 을지문덕, 해군장관은 이순신, 교육부장관은 설총, 전권대사는 정몽주, 검찰총장은 조광조, 국립대학 총장은 이황, 군악대장은 왕산악 – 하는 식이다.”

권력의 이해관계에 맞출 게 아니라 넓은 시야로 최적임자를 구하라는 에두름인 것이다.

평균 6.5매의 짧은 칼럼에서 그는 동서고금의 사례를 풍부하게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이끌어내는데 탁월했다.

공개된 칼럼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사전 준비’가 90%인 셈이다. 소득의 20%는 에누리없이 책을 구입하는데 썼다는 그의 서재엔 1만5천여권의 장서가 가득했고 집필한 저서만 해도 개화백경, 한국인의 재발견,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학 에세이 등 주로 한국학 분야로서 120권이 넘는다.

매일 칼럼을 연재하는 촉박한 일상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여행 – 이 경험들이 모두 칼럼의 소재였으니 여행이라기보다 출장이라고 해야 맞겠다 –도 자주 했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서 쓴 <신 열하일기>는 2백년의 역사를 이어붙여주는 특별한 묘미를 던져주었다.

1933년 9월6일 전북 장수군에서 태어난 이규태 선생은 2006년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6세 연상이며 생일도 같은 김용운박사는 필생의 역작인 역사문명 비평서를 87세(풍수화), 91세(역사의 역습)에 펴냈고 92세인 금년엔 ‘수학에서 구조주의까지’를 주제로 한 저서를 탈고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는 99세를 맞은 지난 1월 <백년을 살아보니>를 출간했고, 김병기 화백은 103세를 맞은 올해 4월 ‘여기, 지금’이란 주제로 가나아트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00세 시대에 걸맞게, 100세 전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 이규태 선생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있다면 한일관계와 남북관계, 대통령의 인사문제와 경제문제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금의 세태를 어떻게 보았을까.

공시적 시각으로 갑론을박하는 논객들이 대다수인 시대에, 과거와 현재를 씨줄날줄로 엮은 통시적 시각으로 에둘러 아픈 곳을 찔렀던 이규태 선생의 칼럼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본사 전무>

'이규태 코너'에 소개됐던 이규태 캐리커처. 시대에 따라 곰방대에서 연필, 컴퓨터로 상징물이 바뀌었다(김도원 화백 작품).
'이규태 코너'에 소개됐던 이규태 캐리커처. 시대에 따라 곰방대에서 연필, 컴퓨터로 상징물이 바뀌었다(김도원 화백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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