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45> 박형진, ‘다시 들판에 서서’

[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45> 박형진, ‘다시 들판에 서서’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9.08.21 07:24
  • 수정 2019.08.2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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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없이, 비에 젖지 않고, 어찌 다시 새 생명이랴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

눈물 뿌리지 않는다면

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

사랑일 수 있으랴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

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

네 몸뚱이, 죽어

또 죽어 땅에 몸 눕히면

구름만 덮일 뿐 모두 다 떠나가는데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

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

어찌

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 박형진, ‘다시 들판에 서서 2’ 전문

 

변산반도 모항은 한적한 어촌이다. 동구 밖엔 시나브로 바닷물이 첨벙댄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모항에 가면 바다를 보듬고 하룻밤을 잘 수 있다고 노래했다. 뒷동산은 천연기념물 호랑가시나무 군락지가 있고 100년 넘은 팽나무가 마을을 보듬는다.

농사꾼 시인 박형진은 이 마을에 산다. 그는 이 마을에서 칠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9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해 빼어난 농촌시와 산문을 선보였다. 흙냄새를 글 향기로 물씬 풍겨주는 그의 시집 제목은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산문집은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이다. 시인의 자식들 이름은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역시 그는 천부적 농부시인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농촌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격렬하다. 당그래 출판사에서 펴낸 ‘다시 들판에 서서’라는 시집에서는 농부로서, 가장으로서 직면한 농촌현실 문제를 완숙한 시야로 바라보았다. 자연에 대한 겸허, 자연과 어깨동무하는 삶,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공동체 정신이 행간마다 잔잔히 흐른다. 한 시대와 화해의 몸짓으로 읽힌다.

그럼으로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눈물 뿌리지 않는다면/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사랑일 수 있으랴”,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어찌/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이성부 시인이 노래한 ‘봄’처럼 그의 삶도 우리네 세상만사도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으로 ‘다시 들판에 서서’ 새로운 봄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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