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우리 역사 정리 필요한 ‘학생독립운동’ 연구·조사사업

<김성의 관풍(觀風)> 우리 역사 정리 필요한 ‘학생독립운동’ 연구·조사사업

  • 기자명 김성
  • 입력 2019.06.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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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우리 관광객들이 뜻밖의 참변을 당한 가운데 기쁜 소식도 연이어 들려온 열흘간이었다. U20 축구대표팀이 사상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고, 이정은6은 유에스오픈여자골프챔피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라는 영화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아이돌스타 BTS는 미국과 영국의 대형 무대에서 대박 공연을 펼쳤다. 외신들은 비틀즈나 마이크 잭슨보다 더 뛰어난 21세기 스타로 평가했다. 영국 토트넘의 손흥민도 비록 팀은 패배했지만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해 유럽인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BTS 등 세계무대에서 속속 빛내는 大韓 젊은이들

우리 정치권이 혼돈의 늪에 빠져있는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은 전 세계에서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락에 빠져있고, 공동체보다 개인생활에 매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이라는 기성세대의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당당했다. 과연 이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청년들이 근대역사의 흐름에서 결코 체념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꾸준히, 주체적으로 투쟁해 온 결과에서 비롯됐다고 단언한다.

지난 100년간의 끈질긴 투쟁을 생각해 보자. 조선 말기 강대국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을 때 조선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 조국을 살리고자 나섰던 사람들은 농민이 중심이 된 동학혁명군이었다. 세도정치(勢道政治), 매관매직(賣官賣職)에 가렴주구(苛斂誅求)까지 판을 치는 정부를 제쳐두고 그들이 외세에 저항하여 일어선 것이다. 조선말 의병(1985~1910년) 역시 중앙의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지방의 선비와 서민, 심지어는 머슴들이 주역이었다.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 때문에 일제는 조선을 섣불리 병탄하지 못했다. 결국 1909년 9월 1일부터 충청도에서 전라남도 장흥까지 ‘남조선대토벌’이라는 토끼몰이식 포위 섬멸작전을 벌였다. 2개여단 병력과 해군을 동원하여 의병토벌작전을 펴면서 아무 죄도 없는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가옥을 불태웠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조선을 삼켰다.

독립운동-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온 대한민국 청년정신

그러나 비록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으나 국민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라는 국제 정세의 영향을 받아 1919년 3·1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독립운동이 실패하자 일부는 중국으로, 러시아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벌였고 국내에서는 인재를 육성해 독립을 준비하자는 교육사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러한 민족적 자각은 식민지 20년이 지난 뒤인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은 물론 해외로까지 번져나간 11·3 학생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은 1년도 채 못돼 진정되었지만 학생들 사이에 독립에 대한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아 전국에서 크고 작은 운동이 계속되었다. 식민지 30년이 지나자 지식층을 중심으로 친일변절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1943년 광주에서 또다시 제 2학생운동이 일어나 4명이 죽고, 수백명이 구금됐다. 학생들의 지치지 않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 정신’은 해방이후에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죽거나 구금을 당하면서 불의(不義)에 과감히 항거하는 4·19와 5·18이 일어나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성시켰다. 결국 체념하지 않은 젊은 청년들의 정신이 지난 100년간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블랙리스트 시대’엔 도전·자유분방 엄두도 못내

하여 오늘날 봉준호나 BTS가 등장하게 된 것은 우리 국민 마음에 자리잡은 민주·인권·평화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전히 물려받지 않아야 할 나쁜 보수주의의 낡은 틀에 잡혀있었더라면, 군부독재에 억눌려 있었더라면, 여전히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있었더라면 과연 자유분방한 사고와 창작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독재에 저항하는 수많은 희생이 없었더라면, 언론의 자유가 없었더라면 과거 독재체제 정당을 계승해온 정치인들이 감히 대통령에게 시도 때도 없이 욕에 가까운 ‘막말’을 해대는 자유를 누릴 수나 있었겠는가? 오늘날 젊은이들은 이처럼 면면히 흘러내려온 정신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었고, 민주적 환경이 바로 이들에게 도전의 의욕을 키워주었다고 생각한다.

부실한 ‘학생독립운동’ 실태…일본이 깔볼까 걱정

그러나 화려한 행사만으론 역사가 계속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임시정부나 5·18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근거없는 부정을 막기 위해선 확실한 역사의 정리가 필요하다. 학생독립운동도 부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3년 ‘학생의 날’로 국가기념일 지정이 되었다. 하지만 1973년 유신정부때 없어졌다가 1984년에야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이때 ‘학생의 날’은 학생은 면학에 충실해야한다는 의미를 가졌을 뿐이었다.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됐지만 이번에는 해마다 각 시도를 돌아다니며 기념식을 열도록 해 그밖의 지역에서는 망각에 빠졌다. 학생독립운동 참여학교와 학생수 역시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비밀문서에 의해 194개교 5만4천명으로 알려져 왔으나 2006년 광주광역시 교육청이 조사결과 320개교로 늘어났다. 참여 인원은 추정하지 못하고 있다. 광주와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 대부분의 학교는 자기 선배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자체조차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스스로 역사를 재정리하지 못하고 일본의 자료에 의존해서 그 규모를 정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오늘날 이런 사실을 일본이 알게 된다면 한국의 역사의식을 얼마나 깔볼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따라서 우리도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보다 구체적인 기록으로 항상 기억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전국 각 지역의 향토사, 교지(校誌), 개인 회고록, 후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우리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여야 한다. 일본의 자료는 그 기록을 보완하는 참고자료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우리 젊은이들은 선배들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국가적 긍지도 가질 수 있다. 정부는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거국적인 조사·연구로 진정한 우리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만든 역사로 긍지와 도전정신 갖길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자랑스러운 젊은이들이 예술·체육 분야뿐만 아니라 학술·정치·경제분야에서도 잇달아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역사적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우선 학생독립운동을 재조사할 것을 촉구한다. 올해가 90주년이기 때문이다.

김성(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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