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처용가와 처용설화의 풍습

[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처용가와 처용설화의 풍습

  • 기자명 데일리스포츠한국
  • 입력 2019.04.0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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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시절 ‘처용’을 ‘풍두’라 부르다

[데일리스포츠한국] 신라 49대 헌강왕 때의 일이다. 헌강왕이 개운포(현재의 울산)에 행차했다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었다.

이에 기상이변이 동해 용(龍)의 조화임을 알고 그를 위해 절(망해사)을 세우도록 명하자 곧 안개와 구름이 걷히고,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왕을 칭송하며 춤을 추고 연주를 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 하나를 왕에게 주었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서울(서라벌)로 가서 정사를 도왔다. 왕은 그를 곁에 두기 위해 그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급간 벼슬을 내렸다.

역신(疫神)이 처용 아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 밤에 몰래 처용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와 동침을 했다. 처용이 야심한 시각까지 놀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여니 아내가 외간 남자와 누워 있었다. 이에 처용은 아래의 <처용가>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동경(東京: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역신은 처용에게 감복해 그 앞에 꿇어앉아 이후로는 처용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그 집의 문에는 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이후 처용의 형상을 문 앞에 붙여 악귀를 쫓는 풍습인 ‘벽사진경’이 되었고, 신년에 부적으로 처용의 형상을 그려 사기를 쫓는 풍습으로 남아 있다.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1505년) 7월 19일 임인 6번째 기사

“처(處) 자는 곧 죄인 김처선(金處善)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자를 쓰지 말라”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처’ 자를 쓰지 말게 하다)

이 시기에는 “처용을 풍두(豊頭)”라고 불렀다.

(이연숙, 신라 처용설화의 생성배경에 대한 연구) (계속)

※ 여기 연재되는 글은 필자 개인의 체험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종교와 종교인 등과 논쟁이나 본지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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