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연산, 사랑한 이를 위한 굿

[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연산, 사랑한 이를 위한 굿

  • 기자명 데일리스포츠한국
  • 입력 2019.03.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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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혜서·영혜실을 짓고 직접 굿 하기도

[데일리스포츠한국] 1505년(연산군 11년) 9월 연산군은 예조에 속한 한성부의 장악원(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을 연방원으로 개칭하고 재정비했다.

그는 조선왕조의 그 누구보다도 음악과 예술을 사랑했던 군주였다. 그는 생모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흥청과 운평(관기), 무희를 곁에 두고 고운 음률과 가락, 그리고 익살과 재담을 즐겼다. 폭군일지언정 그는 기생과 재인의 재능을 진정으로 아끼고 보호하며 사랑했던 그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였던 것!

연산군일기 59권, 연산 11년 9월 15일 병신 2번째 기사에는 연산군이 직접 무당과 굿을 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인은 원주 기생 월하매(月下梅)이다. 음률을 알고 희학을 잘 하여 왕의 뜻에 많이 맞았으므로, 왕이 늘 호방하다고 칭찬하여 사랑이 컸었는데, 병이 나서 별원에 옮겨 있으매 왕이 늘 가서 문병하였다.

죽어서는, 왕이 애도하여 여완(麗婉)이란 칭호를 주고,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제전을 베풀게 하고, 지제교에게 제문을 짓게 하였는데, 글이 뜻에 맞지 않으매, 곧 강혼을 시켜서 고쳐 짓게 하였으며, 친히 두세 번 전을 올리고는 번번이 통곡하였으며, 그 부모 형제를 불러서 인견하였다.

또 후원에서 야제(野祭)를 베풀어, 왕이 비빈. 흥청들을 거느리고 친히 무당의 말을 들으며 더욱 비통해 하였다.

장사지낼 즈음에는, 이런 제사를 한두 번 베푼 것이 아니었고, 재상들로 하여금 제사하는 곳에 와 모이게 하였으며, 추혜서·영혜실을 설치한 것도 다 여완으로부터 비롯하였다.

왕이 두어 해 전부터 광질(狂疾)을 얻어 때로 한밤에 부르짖으며 일어나 후원을 달렸다.

또 무당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주악하고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廢妃)가 와 붙은 형상을 하였으며, 백악에 자주 올라가 굿을 하였으므로, 궁중에서는 폐비가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가흥청의 나인이 죽으면 각사의 제조가 맡아서 담당하게 하다) (계속)

연산군은 성종이 재위 중 혁파했던 수륙재를 부활시켰다. (계속)

※ 여기 연재되는 글은 필자 개인의 체험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종교와 종교인 등과 논쟁이나 본지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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