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장독대 덮개

책과 장독대 덮개

  • 기자명 서재영 교수
  • 입력 2024.03.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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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교보문고 앞을 지날 때마다 의미를 곱씹게 하는 구절이다. 흔히 온라인의 특징을 쌍방향이라고 하는데 가장 오래된 미디어인 책과 사람의 관계도 쌍방향임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었지만, 그 책이 다시 사람을 만든 사례는 무수히 많다. 심지어 불립문자를 지향하며 깨달음의 체험을 추구하는 선승을 통해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책은 사람을 만들고

성철스님은 청년 시절 삶의 문제를 안고 고뇌하던 차에 증도가라는 책을 읽고 한 줄기 빛을 만난다. 한 권의 책이 준 강렬한 체험은 뼈대 있는 유생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던 청년을 출가의 길로 가게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아동에게 한자를 가르치던 교재 천자문에는 염필륜지(恬筆倫紙)’라는 구절이 있다. ‘몽염의 붓과 채륜의 종이라는 뜻이다. 몽염(蒙拈)은 전국시대의 문장가로 최초로 붓을 만든 인물이고, 채륜(蔡倫)은 후한 시대의 환관으로 종이를 만든 사람이다. 책이 탄생하는 과정을 가르치는 대목인데 책을 아는 것이 곧 교육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사기에는 공자도 죽간을 엮은 가죽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역경을 읽고 또 읽었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가 있다. 책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고, 아이를 교육하는 차원을 넘어 사람을 성인으로 단련하는 매개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책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문명이 발전한 국가일수록 책을 숭상하고, 도서관 문화도 발전해 있다. 우리나라의 성장에도 책이 한몫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발간되는 책의 종과 양도 비례하여 증가했다. 통계에 따르면 201981,715종에 달하던 책은 코로나 시기인 2022년에는 61,181종으로 감소했다.

출판계에서는 불황을 토로하지만 2013년에 출간된 책이 약 43천 종이었음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출판업계는 지속적 성장세를 보여왔다. 출판사 숫자도 2012년에 약 42천 개에서 2022년에는 약 75천 개로 늘어났다. 이런 통계를 보면 지금 우리는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많은 책이 쏟아지는 책의 황금시대에 살고 있다.

양웅의 고사에 담긴 교훈

이제 웬만한 사람은 어렵지 않게 책을 출판할 수 있다. 선거철이라도 되면 책과 무관해 보이는 사람조차 출판기념회를 연다. 책은 지혜의 원천에서 개인의 이력을 보여주는 프로필 같은 용도로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 책을 쓰고, 수많은 책을 쏟아내는 것이 마냥 바람직하기만 한 일인지 되묻게 된다.

이와 관련해 되새겨볼 내용이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에 담겨 있다. 후한 시대의 역사가였던 반고는 아버지 반표의 뒤를 이어 역사 편찬에 뛰어들었다. 불행히도 그는 사사로이 국사를 편찬한다는 죄목으로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 편찬을 끝내지 못했다. 그때 중국 최초의 여성 역사가로 평가받는 여동생 반소가 두 사람의 내용을 보완하여 한서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탄생한 한서에는 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서한에 양웅(揚雄)이라는 훌륭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비록 가난하고 찾는 이가 드물었으나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당대의 호사가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찾아와 그에게 학문을 배웠다. 양웅은 명리를 탐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태현(太玄)과 같은 명저를 쓰고, 만물의 근본원리인 ()’에 대해 설명했다. 어느 날 당대의 유명한 학자였던 유흠(劉歆)이 찾아와 양웅의 책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후세 사람들이 이 책을 장독대 덮개로나 사용할까 두렵습니다(吾恐後人用覆酱瓿也).”

나무는 책을 만들고

양웅의 고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첫째, 사람의 무지에 대한 경책이다. 책이 담고 있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장독대 덮개로나 사용하는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이다. 요즘도 주역등의 고전을 들먹이며 고작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나 점치고,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면 나라가 흥한다는 등 주술적 언행을 일삼는 이들이 있다. 심오한 책을 읽고 사소한 일이나 점치고, 길흉화복이나 따진다면 귀한 책을 장독대 덮개로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둘째, 자기가 쓴 책에 대한 겸양의 표현이다. 옛 문장가들 중에는 장독 덮개로 쓰일 책이나 썼으니 헛수고일 뿐(覆瓿書成空自苦).”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대단한 책을 썼다며 우쭐거리는 것이 아니라 냄비 받침대로나 쓰일 책을 내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격이다.

셋째, 가치 없는 책을 내는 것에 대한 경책이다. 작금에 보면 정말 냄비 받침대로나 쓸법한 책들도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온다. 7만 개가 넘는 출판사가 쏟아내는 연간 67만 종에 달하는 책 중에는 장독대 덮개는커녕 물류창고에서 잠만 자는 책들도 수두룩하다.

만물의 근원을 밝힌 양웅의 책조차도 장독대 덮개로 쓰일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이는 아무 책이나 출판하고, 책을 이력서 정도로 쓰는 풍토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소비하는 종이는 약 800t이 넘고, 그중 인쇄용지는 약 250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30년생 나무 약 136백만 그루를 벌목해야 하는 양이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연간 100만 종이 넘는 책이 출판되며, 자비출판까지 합하면 약 4백만 종이 출판된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가 벌목될지 짐작할 수 있다. 장독 덮개로 쓰일지도 모를 책을 위해 수십년 된 나무를 베는 것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나무는 그 자체로 생명의 진리를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책이며,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가장 성실한 활동가이다. 그런 나무를 베어 책을 만든다면 그만한 내용과 가치를 담보해야 할 것이다.

서재영(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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