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 쓸쓸함에 대하여

삶, 그 쓸쓸함에 대하여

  • 기자명 오진곤 교수
  • 입력 2023.11.0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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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깊어 가는 가을의 쓸쓸함에 대하여 노래한다. 도종환 시인은 쓸쓸한 세상에 대해 노래한다. 쓸쓸함이란 외롭고 허전하다는 의미이다. 외롭다는 것은 그리움이고 허전하다는 것은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다는 의미이다. 가을 찬 바람이 불면 쓸쓸해진다. 화려한 국화꽃을 보아도 쓸쓸해지고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아도 쓸쓸해진다. 떨어지는 낙엽 한 송이를 보아도 쓸쓸해지고 붉게 물들어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보면 더 쓸쓸해진다. 도종환 시인은 이 세상이 쓸쓸하여 꽃이 피고 새들이 난다고 한다. 산다는 것이 쓸쓸하여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고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그리워 쓸쓸해 한다. 가을이 깊어가면 문득 누군가 떠오르고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그래서 어떤 가수는 가을엔 떠나지 말고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에 떠나라고 애타게 노래한다. 휘영청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바로 그 옆에는 목성이 빛난다. 이 또한 쓸쓸함을 더한다.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산다는 것은 도대체 슬픈 일인가 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0개월이 지나도록 종전이나 휴전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간의 전쟁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리나 슈발로바는 1986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그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고 페이스북에 <전쟁에 대해 쓴다는 것>이라는 시를 올렸다.

그 어떤 혀도 담지 못한다. 전쟁에 대해 쓴다는 것. 가시 돋친 철사를 천천히 일 센티미터씩 삼키는 것. 꿈속에서 체코 고슴도치를 헐벗은 팔과 다리로 껴안는 것. (중략) 말하라 말하지 마라. 외쳐라 외치지 마라 시인이여. 죽음은 어쨌든 듣지 못한다. 죽음은 폭발음에 두 귀가 멀었고, 죽음은 유탄에 두 눈이 빠져 앞을 못본다. 호메로스의 키클롭스처럼 죽음은 앞을 더듬으며 도시를 헤매고 차갑고 끈적끈적한 두 손으로 길에서 우리를 덥석 잡는다. 죽음의 거대하고 피로한 몸은 불과 철의 냄새가 난다. 죽음 앞에 우리는 아무도 아닌 자.

세계적인 거장 스웨덴의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수치 Shame, 1968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 수치는 전쟁이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과 인간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말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평화롭던 파로섬에 전쟁이 닥치는 과정이다. 중후반부는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인간군들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영화는 평화롭지만 불안해 보이고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얀(막스 본 시도우)과 에바(리브 울만)라는 부부의 삶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은 음악가였다. 부부는 오케스트라가 해체되고 파로섬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둘은 가끔 읍내로 나가 물건도 사고 농작물도 판다. 얀은 심장이 약하고 정신까지 쇠약해진 느낌이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라디오를 통해 듣는 소식들은 삶의 불안감을 조성한다.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들이 물러가면 반대편 군인들이 몰려온다. 에바와 얀은 총을 지닌 위협적인 군인들에게 생존을 위한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불안감에 자동차를 몰고 탈출을 시도한다. 곳곳이 폐허가 되어 있고, 빠져나갈 공간은 없다. 부부는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폭행도 당한다. 안면이 있는 권력자 자코비에 의해서 겨우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자코비가 베푸는 호의조차 불안하고 힘들다. 뻔질나게 부부의 집을 드나드는 그의 비위를 맞추며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자코비는 술을 마시다가 에바에게 노골적으로 추근댄다. 에바와 자코비가 온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얀은 계단에 앉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 속의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나지역 주민들은 영화 속의 얀과 에바보다도 훨씬 더 비참하다. 자존심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를 패배시키겠다고 공언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영원히 전멸시키겠다고 다짐한다. 미국에서는 이스라엘 노인이 팔레스타인 어린아이에게 너 같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외치면서 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보복이 분노를 낳고 분노가 보복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불길처럼 세상 속으로 번지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그들이 당하던 학살 방식 그대로 보복한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내세우며 기습공격을 한다. 유대인을 학살하고 인질로 잡는다. 네타냐후가 가공할 포격을 통해 어린아이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을 사살한다. 가해자의 악행이 보복하는 자에게는 선행이다. 악행과 선행의 구별이 사라진 지 오래다. 피의 보복의 악순환만 존재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지구 침공이 시작되고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팔레스타인 어린 소년을 기자가 인터뷰 한다. “아이야 무섭니?” 아이는 대답한다. “아니요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카메라에 클로즈업 된 아이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다. 누가 이들을 이처럼 죽음의 골짜기로 내모는가? ‘이제 사람들은 전쟁이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지는 것만큼이나 비참하다는 끔찍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언을 새겨야 한다. 보복은 보복을 낳을 뿐 평화는 요원하다는 진리를 그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박노해 시인은 <평화 나누기>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중략)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산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그런 세상을 우리는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오진곤(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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