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역사 바로잡기’의 탈을 쓴 ‘역사 왜곡’

[기자수첩] ‘역사 바로잡기’의 탈을 쓴 ‘역사 왜곡’

  • 기자명 한휘 기자
  • 입력 2023.09.07 09:00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일리스포츠한국 한휘 기자] 역사적 자료와 연구를 통한 검증을 무시하고 내용을 입맛대로 바꾸는 행위를 우리는 ‘역사 왜곡’이라고 부른다.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한 기자는 가깝고도 먼 동북아 3국의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주변국의 역사 왜곡으로 발생하는 폐해를 뚜렷하게 인지했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우리나라 스스로 역사를 왜곡한다고 의심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육군사관학교는 지난달 25일 “양현관 앞에 지난 2018년 설치된 독립군·광복군 영웅 흉상을 철거·이전하기 위해 장소를 검토 중이다”라고 밝혔다.

육사가 언급한 철거·이전 대상 흉상은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이회영 등 독립유공자 5명과 구한말 대한제국 군인인 박승환 참령의 흉상이다.

육사 측은 “위치의 적절성, 국난 극복의 역사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는 문제 등이 있었다”라고 말했고, 이어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한미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체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조성에 중점을 둘 것”이라며 추진 계획을 밝혔다.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 역시 “독립운동보다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대해서만 (기념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개념 설정을 하게 됐다”라며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냐는 문제가 제기됐다”라며 홍범도 장군을 겨냥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논란이 되자 국방부는 흉상 철거가 아닌 독립기념관 이전이라 말했지만, 독립기념관 측은 공간 활용 문제와 전시물 중복 등을 이유로 흉상을 수장고에 보관해야 한다고 말한 만큼 사실상 철거나 다름없다.

육사와 국방부의 주장은 타당할까.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독립군의 위대한 역사를 지우는 왜곡 행위나 다름없다.

육사와 국방부가 가장 집중적으로 제기한 문제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가담 이력이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대 이후 소련 영내로 이동했고, 무장 독립 투쟁이 여의치 않자 소련 공산당 소속으로 고려인들을 이끌었다.

당대 소련은 독립군 세력을 후원해 주는 몇 안 되는 외부 세력이었다. 독립군 군벌을 이끄는 홍범도 장군에게 최우선 과제는 조국의 독립이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을 후원해 주는 곳과 손잡았을 뿐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관념 역시 지금과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에 관해 부정적 시각이 늘어난 것은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 그 이후의 냉전과 동서 대립에서 촉발된 것이지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인식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담했다고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폄훼하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만약 이 논리를 들이민다면 육사가 강조한 한미동맹의 한 축인 미국조차도 2차 대전기 소련과 손을 잡았으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도 ‘공산주의자’인 셈이다.

더구나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1921년 6월 러시아 군대에 의해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독립군이 무장 해제당하고 인명 피해를 입은 ‘자유시 참변’에서 우리 독립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줬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여러 연구로 부정된 학설임에도 무리한 주장을 펴 홍범도 장군의 가치를 내려치고 있다.

홍범도 장군 뿐만 아니라 다른 흉상의 이전 역시 국군의 역사적 뿌리를 흔들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일각에서는 해당 흉상을 철거한 자리에 간도특설대 복무라는 친일 행적이 있는 백선엽 장군의 흉상을 설치할 계획이 있다는 소식까지 전하고 있다.

갖은 논란 속에서도 국방부는 군 내부 인사들로 역사와 전사를 연구할 수 있으므로 외부 협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독선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육사는 지난달 31일 당초 의도대로 흉상 이전 절차를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선전 및 선동”으로 치부하고 일부는 막말까지 쏟아내고 있지만, 이 일은 정치의 일선을 넘어선 일이다.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이 나라의 터를 닦은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들을 기리는 모습은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

그간 사학계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같은 나라 고위층에서 왜곡이나 다름없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역사 연구하기 참 좋은 나라다.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