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 기자명 오진곤 교수
  • 입력 2023.05.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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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랫집 할아버지께서 87세로 세상을 뜨셨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지금 우리가 사는 집터의 큰 산을 개간해 아주 넓은 밭을 경작하셨다. 건강하고 부지런하셔서 별명이 인간 포크레인이었다. 그렇게 강인하던 분이 몰고 가던 오토바이가 논두렁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14년 동안이나 동갑내기 할머니의 병간호를 받다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녁 무렵이면 할머니 울음소리가 집 밖까지 새어 나온다. 동갑내기 남편을 떠나보낸 할머니에게 이 봄날은 어떤 의미일까?

올해 97세이신 큰 외숙을 뵈었다. 큰 외숙의 누님인 우리 어머님께서는 올해 104세이니 외가 집안은 장수 집안이다. 큰 외숙께서 나를 붙잡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어 놓으신다. 외조부께서는 87세에 돌아가셨다. 그때 큰 외숙을 비롯한 6남매는 우리 모두는 87살까지만 산다라고 형제간의 결의를 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인생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큰 외숙께서 87세가 되자 앞으로 3년만 더 살고 세상을 떠난다고 말씀하셨다, 큰 외숙은 그때까지도 운전을 스스로 하셨다. 90세가 되자 그럼 앞으로 5년만 더 살다 떠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95세를 넘어 올해도 정정하신 97세이시다. “풍조야 요즘 할 일이 없어서 너무 지루하다며 나의 손을 꼭 붙잡으신다. 올해 97세이신 큰 외숙께 지금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1993년도에 국내 모방송사에서 방영된 산다는 것은이라는 주말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시청률의 대가라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홍원표(원미경) 홍정표(맹상훈) 홍숙표(김혜선) 홍은표(유호정) 4남매의 모습을 통해 형제간의 사랑과 행복의 실체를 파헤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사업에 실패한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다. 동생들은 큰 집에 맡기고 원표는 교수(전양자) 집안에 입주 가정부를 한다. 그렇게 알뜰하게 돈을 모아 집도 장만한다. 동생들을 어미 닭이 병아리 품듯 남동생 결혼도 시키고 보살피며 산다. 드라마와 더불어 김종찬이 부른 주제곡도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내 어깨 위로 짊어진 삶이 너무 무거워 여기서가 끝이 아님을 우리 기쁨처럼 알게 되고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지산다는 것은의 주제곡 가사처럼 우린 지금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느끼며 살고 있는가?

최근 유행어처럼 번지는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잘 산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고 건강하고 병들지 않고 사는 것인가? 통계청에 따르면 2020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우리나라의 인구의 15.7%이다. 2년 뒤 2025년에는 20.3%에 이른다.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이다. 정년까지 일하는 직장인의 비율은 7.6%에 불과하다.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 등으로 은퇴 시기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50세 전후로 직장을 퇴직하고 쉬거나 단순 노무를 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한편으로 은퇴는 직장에 더 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인생 2막을 구상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요즘 은퇴자들을 위한 지방 지자체의 귀농귀촌 교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농업을 주업으로 자신의 주 주거지를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기는 사람을 귀농인이라 한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주 주거지를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기는 사람은 귀촌인이라 한다. 귀촌인은 생활에 필요한 소득의 대부분을 농사 이외의 부분에서 충당한다, 태안군에도 다양한 귀농귀촌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귀농귀촌인이 정착하기 전에 지역을 알고 탐색하기 위한 임시 거주공간을 제공하는 귀농인의 집도 있다. 마을에서 15일 이상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농촌의 문화와 영농기술을 미리 체험해보는 농촌에서 살아보기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인생 2막을 시작하며 자연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농어촌지역을 고려해 보는 것은 풍성한 삶을 위한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웰빙(well-being)과 더불어 웰다잉(well-dying)이라는 용어도 요즘 많이 회자 되고 있다. 웰다잉은 죽음을 평온하고 품위 있게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삶의 질을 최대화하고 개인과 사회가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 2009년 선종하신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생명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죽음의 과정을 받아들였다. 평소 존엄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온 추기경께서는 병세가 악화된 2008년 말부터 기계적 치료를 거부했다. 그다음 해에는 어떤 환자 가족이 세브란스 병원을 상대로 낸 연명치료 중단 민사 소송에서 승소함으로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공론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국내 연간 사망자 31만여 명 가운데 80% 이상은 병원이나 복지시설 등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들 중 무의식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받거나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가 많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여전히 전 국민의 3%대에 불과하다. 전체 사망자의 26%가 암으로 숨진다. 암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 정도이다. 전국 호스피스 병상이 턱없이 부족한 1500여 개 정도에 불과하고 이용 기간은 20여 일에 그치고 있다. 잘 죽기 위해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웰빙과 웰다잉은 잘 살고 잘 마무리하는 삶의 한 과정이고 그 의미가 상통한다. 산다는 것과 죽는 것은 이분화가 아니다.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삶의 존엄성을 지키며 달빛처럼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기 위해 개인이나 사회는 웰빙과 웰다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진곤(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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