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사의 일제수뇌폭살 90주기

윤봉길의사의 일제수뇌폭살 90주기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4.28 09:06
  • 수정 2022.04.2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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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9일은 25세의 대한 청년이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뤼순공원)에서 열린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 일제 고위 장성 등 여럿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게 한 의거 90주년이다.

의거의 주인공은 바로 윤봉길의사이다. 이 의거는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주고, 특히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 총통이 “5억 중국 인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윤봉길 의거가 없었다면 중국 내의 우리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들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 의사는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선구자이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 178번지의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큰아버지 윤경에게서 마을 친구들과 한문을 배운다. 1918년 11세가 되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서울에서 3ㆍ1혁명이 시작되고 만세 시위가 지방으로 번지자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윤봉길은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며 학교의 문을 박차고 나와 자진 퇴학했다. 어릴 때부터 대단히 심지가 굳고 용기가 있었다.

집안 어른들의 설득으로 1년여 뒤 서당에 다니기로 하고 마을에서 학식이 높은 최병대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 봄에는 마을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서치의숙(학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의 가르침을 받았다. 여기서 다양한 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5년간의 서치의숙 생활을 마치고, 더 깊고 넓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명성이 높은 당진군 면천의 유학자 박생원과, 당고모부가 되는 신양의 차 선생을 차례로 마을로 모셔와 공부했다.

윤봉길은 19세 때부터 직접 농민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 자기 집 사랑채에 야학당을 차리고 마을 주민들의 문맹 타파에 나섰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갑ㆍ을 두 반으로 나누어 한글과 역사ㆍ산술, 과학ㆍ농업지식 등을 가르쳤다. 독서회를 열어 많은 사람이 책을 읽도록 하고, 이웃 마을을 순회하면서 월례 강연회도 열었다.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독서회와 강연회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20세 때에는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직접 지었다.

윤봉길이 국내에서 농촌계몽 활동을 접고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30년 3월, 그의 나이 23세 때이다. 길을 떠나면서 “대장부가 집을 떠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글을 남겼다. 윤봉길은 평안도 선천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한 달가량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만주 일대를 헤매다가 다롄을 거쳐 칭다오에 머물면서 이듬해 상반기까지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세탁소의 경리로 일하면서 중국의 정세를 살폈다.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31년 5월 8일이다. 도착 즉시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찾아 그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생계를 위해서 동포가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하면서 ‘한인공우 친목회’를 조직했다. 노동쟁의를 도모하고 일제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1932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래 틈틈이 도시의 거리를 익히고 각종 정보를 취득한 다음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상하이지역 한인 교포단장인 김구를 찾아가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김구는 윤봉길을 만나 그의 인품과 애국심을 알아보고 “노소의 차이가 있을 뿐 민족혁명 대업을 위한 다시없는 큰 동지를 얻었다”며 그를 한인애국단에 가입시켰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결사대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윤봉길이 가입하기 전인 1월 9일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이봉창도 한인애국단원이었다.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들은 윤봉길은 더욱 의기충천했다. 김구가 별도로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은 외적을 상대로 의열투쟁이 자칫 임시정부의 위상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

윤봉길은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에 중국군 제19로군 정보국장 겸 병공창 주임인 한국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주선으로 일본군 병기창 폭파계획에도 참여했다.

중국 신문에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실렸다. 윤봉길은 하늘이 준 기회로 생각하면서, 다시 임시정부로 김구를 찾아가 거사 계획을 밝혔다. 김구는 비밀조직 참모격인 김홍일에게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성능 좋은 폭탄 제조를 지시했다. 일제는 모든 행사장에 참석하는 일본인에게 반드시 물통과 도시락을 지참토록 했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이봉창이 일왕이 탄 마차에 던진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았던 탓에 일왕을 죽이지 못한 것을 개탄한 김구와 김홍일은 상하이 중국군 비밀 공병창에서 성능이 뛰어난 폭탄을 만들어 성능실험까지 마쳤다.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와 만나 세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김구의 비밀 아지트인 상하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거행했다. 윤봉길은 태극기 앞에서 폭탄과 권총을 들고 다음과 같이 선서한다.

“나는 적성(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다음날 태연한 모습으로 행사장을 돌아보고 와서 짧은 자서전과 ‘거사가’, ‘조국의 청년제국에게’그리고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썼다.

마침내 운명의 날 4월 29일이 밝았다. 윤봉길은 ‘최후의 만찬’이 아닌 ‘최후의 아침’을 김구와 함께 먹고, 김구가 차고 있던 낡은 시계와 자신의 새 시계를 바꿔찼다. 자기의 시계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오전 11시 50분(한국시간 12시 40분경), 일본군의 천장절과 전승 축하 행사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은 연단 중앙을 향해 폭탄을 힘차게 던졌다. 순간, 폭음이 터지고 참석한 일제의 요인들이 추풍낙엽처럼 거꾸러졌다. 시라카와 대장, 카와바타 상하이 거류 일본인 민단장은 폭사하고, 노무라ㆍ우에타 중장, 시게미쓰 주 상하이 공사, 무라이 상하이 총영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폭탄이 적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순간,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다.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윤봉길의사는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공병 작업장에서 일본군의 총살형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의 지시를 받은 박열ㆍ이강훈이 주선하여 1946년 6월 30일 고국으로 돌아와 용산의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짧은 생애지만 보통사람의 500년보다 훨씬 값진 생애였다. 윤 의사의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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