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유행어 ‘객고’ ‘육박전’

70년대 유행어 ‘객고’ ‘육박전’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2.0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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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사회적으로나 남북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복합적이고 복잡다난한 시대였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유신독재로 시작하여 긴급조치 시대를 거쳐 궁정동의 10ㆍ26사태로 막을 내린다. 경제적으로는 고도산업화 단계로 엄청난 국부를 이루면서 남여간ㆍ지역간ㆍ산업간의 심각한 격차를 이루어 갈등을 조성하고 사회적으로는 이로 인한 본격적인 도시화와 농촌황폐, 향락ㆍ범죄현상이 증폭한다.
70년대 초두를 장식한 사건은 김지하 시인의 ‘오적’ 사건이다. 김씨는 당시 사회의 타락한 지도층을 오적으로 형상화하여 신랄히 풍자했는데, 이것이 반공법 위반혐의를 받아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정치사건으로 비화되고 곧 국제적인 관심사로 이어져 엠네스티 조사단이 방한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세간에서는 오적이란 말이 독선ㆍ부패ㆍ특권층을 비판하는 용어로 금방 유행되고 회자되었다. 
70년대 초에 나타난 큰 사건으로 정여인 사건과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있다. 정여인 사건은 서울 강변도로에서 발생한 정인숙양 피살사건으로 ‘오빠 조심’이란 말이 유행되었는데, 오빠가 정양의 문란한 사생활에 격분하여 총을 쏜 것이라는 경찰 발표 이후 생긴 은어였다. 명함 운운은 피살된 정여인의 몸에서 당시 행세깨나 한 모모 고관들의 명함이 무더기로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여인은 최고권력자를 포함하여 막강한 권력자들과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복수여권과 많은 외화를 소지하고 있었고, 미혼 여성의 몸으로 성일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은 “성일이가 박성일인지 정성일인지를 밝혀라”고 다그쳤다. 대학가에는 “성일이가 누구냐고/물으신다면/고관의 씨앗이라고/대답하겠어요”라는 ‘눈물의 씨앗’이란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은 박정희, 국무총리는 정일권이였다. 이와 관련 청와대 안방에서 ‘육박전’이 벌어져 화제가 되었다. 육영수와 박정희의 부부싸움을 빗댄 말이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부실ㆍ날림을 비꼬는 용어가 될 만큼 정부건설행정의 부실성을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고속도로도 누워 있기 망정이지 세워놓았으면 몇천 번 넘어졌을 것이란 조롱까지 나돌았다.
서울 평화시장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어 광주대단지사건, 실미도난동, 사법파동 등 사건ㆍ난동ㆍ파동이 잇따라 70년대 초의 사회적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특히 사법파동과 관련, ‘객고’라는 말이 한때 시중의 음란성 유행어의 대종을 이루었다.
‘객고파동’은 1971년 7월 28일 서울지방법원 판사 37명이 무더기로 사표를 제출하여 사법파동의 계기가 되었는데, 서울형사지법의 이 모 판사가 증인신문을 위해 제주도에 출장을 가서 변호사로부터 여비와 향응을 받았는데 이를 검찰이 “객고를 풀었다”라고 적시한 데서 발단된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 객고(客苦)의 어의 해석을 둘러싸고 화제가 만발했는데, 의미의 비속화 때문인지 강한 유행성을 띠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후보의 일대 접전이 벌어진 제7대 대통령선거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박정희의 공약이 나올 만큼 절박한 한 판 승부였다. 박정희는 이 공약을 지켜(?) 국민의 직접선거가 아닌 유신체제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통령선거전과 관련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인 정일형 의원 집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범인(?)은 그 집의 고양이라고 경찰이 밝혀, ‘화재 범인은 고양이’ 라는 유행어가 생기고 해외 토픽에 오르게 되었다.
유신헌법에 저항하여 개헌론이 지식인, 학생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게 되자 정부는 잇따라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봉쇄했다. 이것이 ‘긴조시대’라는 줄임말로 불려지고, 아울러 우리 사회에 유언비어ㆍ유비통신ㆍ카더라방송ㆍ지하언론이 범람(?)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언론의 자율선언이 전국적으로 일게 되었지만 대부분이 일과성으로 끝나고,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격려광고가 한때 지면을 장식하는 언론사상 이변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격려광고의 문안에 자율언론을 주도하는 원로 언론인을 비꼬는 ‘여동숙자일동(女同宿者一同)’이라는 격려광고(?)까지 나타나 한때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을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라 표현하여 ‘일부’와 ‘몰지각’이란 말이 세간에 빈정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유기천 서울법대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대학의 수난을 대변하는 상징어처럼 통용되었다. 
재야의 민주화운동은 종교계에도 확산되어 정의구현사제단 등 신ㆍ구교의 양심적인 목회자들이 현실참여에 나섰으며, 양심세력의 대표자들이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했다. 당시 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인 이 ‘헌장’은 곧 자연보호헌장, 새마을헌장 등 관변의 기관에서까지 애용하게 되고, 짖궂은 친구들은 주당헌장(酒黨憲章), 금연헌장, 연애헌장 등으로 애용하였다. 또한 시국선언과 기도회가 시국과 관련하여 자주 열리고 서명운동이 뒤따랐다.
재야의 활발한 움직임에 정부측에서는 안보제일주의, 총력안보, 안보궐기대회 등으로 맞섰다. 여기에 신민당 김옥선 의원이 ‘관제안보’를 들고나서 안보만능의 정부시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그는 결국 국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유신정부는 ‘중대발표’를 즐겼다. 이것은 물론 독재정권의 대국민 충격요법이겠지만, 심장이 약한 국민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충격적인 일이었다. 중대발표는 유신 선포에 이어 이후락 정보부장의 북한 방문, 긴급조치 선포와 비상조치, 심지어 석유가 나온다는 발표, 그리고 박정희 유고라는 중대발표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후임자들 역시 이런 행태를 즐겨 김일성 사망 등 ‘중대발표’를 남발했다.
유신체제가 한창 독기를 품어 극성을 부리면서 지도층 인사들이 이성을 잃고 망언ㆍ아첨을 서슴지 않았다. 문교장관에 임명된 유기춘 교수는 ‘둔마소직(鈍馬小職)’ 운운하며 황공무지한 자세를 보여 이 발언이 일시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철승 신민당 대표의 ‘중도통합론’ 역시 아리송한 의미와 함께, 각종 모임에서 타결이 잘 안되거나 진위가 모호할 때면 중도통합적으로 해결하자고 비아냥, 부정한 타협노선을 일컫는 말로서 크게 번졌다.
3ㆍ1구국선언 사건이 ‘명동사건’으로 불릴 만큼 언론의 왜곡보도가 심해진 가운데,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 사건’의 진상 역시 국내언론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농촌의 실정은 산업화의 진척과 더불어 갈수록 어려워져 정부에 의해 반강제로 심은 다수확 신품종 볍씨 ‘노풍’의 피해가 무려 230만 섬에 이르렀다. 
따라서 노풍은 ‘NO風’ 즉 정부가 미국쌀을 도입하기 위해 풍년이 들지 않도록 하는, 노풍을 심도록 권하여 농촌을 망치게 했다는 불신의 이름이 된 것이다.
유신체제가 장기화되어 가면서 사회부조리가 만연, 현대아파트 불법분양 사건이 터지고, 3선개헌 때 변절하여 공화당의원이 된 성낙현의 여고생 추행사건이 발생했다. 여고생 추행사건은 박정희의 스캔들과 오버랩되어 한동안 세간에 ‘영계’라는 부도덕성의 은어로 나돌았다.
마침내 궁정동의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 고가의 양주 시바스 리걸이 엎어지면서 김재규장군의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이란 말과 함께 대통령 살해가 이루어지고 박정희 유고가 밝혀져 노도광란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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