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유행어에 담긴 시대상

해방 후 유행어에 담긴 시대상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1.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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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났어, 정말!’ 이란 말이 유치원생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유행된 적이 있었다. ‘잘났어, 정말’은 냉소와 야유로 가득 찬 경멸의 언사다. 정말로 잘났다는 긍정이 아니라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는 조롱이다. 이 유행어는 오랜 독재와 억압에서 벗어난 국민들의 탈권위주의를 반영하는 한편, 위선에 대한 통쾌한 야유가 깃들어 있다. 아울러 일체의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는 언어공해의 요소 또한 적지 않았다.
“내가 이럴려고 대통령이 됐나”, “염병하네” 등이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히트를 쳤다. 유행어는 그 시대 그 사회의 생태를 가장 날카롭게 반영한다. 유행어는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풍자, 고발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윤석열 국민의 힘 후보의 ‘개 사과’ 발언이 회자된다. 
유행어는 속담과는 다르다. 속담은 전통문화의 정수이자 시대정신의 집약체로서 수명이 긴 데 비해 유행어는 지극히 일정한 시간 내에만 생명력을 유지한다. 은어와도 다르다. 은어는 은밀하게 나도는데 유행어는 공개적으로 활동한다. 
유행어는 끊임없이 변모하는 언어의 첨병이다. 때로는 사전적 의미마저 바꿔버려 낡은 시대의 사전을 휴지로 만들기도 한다. 흐르는 물이 단애(斷崖)를 만나면 거센 물거품을 품어내듯 유행어도 정치ㆍ사회적 변동을 겪을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해방 7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 나타나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던 유행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의 지난날이 격동의 세월이었기에 유행어도 다양하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 삐뚤어진 현실 등을 몇 마디 말로 농축시킨 결정체인 유행어는 바로 우리 사회상의 집약이고 민중의 애환을 대변한다. 해방 이후 유행어에 나타난 사회상을 살펴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키고 2020년대의 새로운 삶을 설계했으면 한다.
8ㆍ15광복은 언어의 해방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은어나 속담은 있었어도 유행어는, 그것도 현실을 풍자하거나 비꼰 유행어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된 풍토에서 유행어라고 특별히 성역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나돈 말이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고 일본놈 일어난다. 조선놈 조심해라”였다. 총독부가 의도적으로 조작해 퍼뜨렸다. 
남북한이 분단되자 북한 공산 치하에서 남한으로 ‘38따라지’들이 대거 월남해 왔다. 월남민들을 왜 ‘38따라지’라고 불렀는지는 분명치 않다. 원래 따라지란 보잘 것 없이 키와 몸이 작은 사람을 일컫기도 하고, 화투 노름판에서 ‘한 끗’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사전에서는 ‘따분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 따분한 존재’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월남민의 따분한 처지를 빗대어 생긴 조어인 듯하다.
해방공간의 유행어 가운데는 ‘통역정치가’란 것이 있었다. 영어 몇 마디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행세하게 되고, 여기에 곁들어 ‘모리배’ ‘간상(奸商)’이라는 부도덕한 정상배들이 설쳐 정부 예산을 빼돌리거나 양곡을 매점매석하여 폭리를 챙겼다. 도시의 이런 협잡 속에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란 말이 생길 정도로 궁핍이 심해 굶어 죽는 사람이 가끔 나타나기도 했다.
해방 직후의 50년대에 나타난 유행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바사바’ ‘빽’ ‘골로간다’ ‘얌샘이 몬다’ ‘공갈 때린다’ ‘사쿠라’ 등이 있다. ‘사바사바’는 뒷구멍으로 숙덕거리는 부당거래와 밀약을 지칭한다.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법이나 행정 질서보다는 불법 뒷거래가 성행하는 사회풍조에서 나타난 말이다.
‘빽’이란 말은 영어의 Back, 즉 ‘배경’이란 뜻의 외래어에서 유래한다. 혼란스런 사회에서는 능력이나 재능보다는 배경이 더 위력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배경은 권력, 금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빽’이란 조어까지 생기게 되었다. 줄(絲)과 쌀(米), 돈(金)을 합성하여 만든 것이다. 6ㆍ25전쟁 때 사병들이 죽을 때 빽 빽 하고 소리쳤다는 재담도, 이런 배경이 없어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풍자하는 것이다. 
‘골로 간다’는 6ㆍ25전쟁 때 생긴 유행어다. 골로 간다, 즉 산골짜기로 끌려간다는 뜻이니 죽는다는 말이다. 풀어 말하면 인민군의 우익학살이나 군경의 민간인 학살이 다 산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총살 또는 생매장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얌생이 몬다’ 라는 말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전쟁 후 부산에서 어떤 사람이 방목한 염소를 찾으러 미군 부대 안에 보초병의 허가를 얻어서 들어갔다가 나올 때 하찮은 물건을  훔쳐왔다. 이 사람은 여기에 재미를 들여서 다음에는 계획적으로 염소를 미군 영내에 들여보내고 찾으러 가서 그런 일을 거듭했다. 그래서 ‘얌샘이 몬다’라는 말은 계획적으로 다른 일을 빙자해서 무엇을 훔쳐내는 것을 의미한다. 얌샘이는 염소의 경상도 사투리다.
‘공갈 때리다’는 수복 후에 발생하여 근래까지 유행했다. 본래 ‘공갈 때리다’는 한자의 공갈(恐喝)에서 나온 것. 그러나 이것이 유행의 과정에서 당초의 협박 공갈의 의미보다는 거짓말 또는 과장이란 뜻으로 변용되었다.
정부의 계속된 허세와 위약이 이런 유행어를 생성토록 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6ㆍ25 전쟁이 나기 전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 먹는다’는 등의 허풍으로 국민을 기만, 실제 전쟁이 터지자 대구서 점심 먹고 부산에서 저녁 먹는 패배를 당해야 했던 것이다. 또 이승만대통령은 수도 서울의 사수를 라디오에 녹음방송, 시민들을 남겨놓고 정부만 몰래 피난하는 행태에서 ‘공갈 때리다’라는 유행어가 생긴 것이다.
‘사쿠라’란 말은 수명이 가장 긴 유행어 중의 하나로 일본말에서 연유한다. 일본어에서는 말고기(馬肉)를 ‘사쿠라’라고 하는데, 이는 말고기의 빚깔이 쇠고기같이 암적색이 아니고 홍색, 즉 앵두꽃에 가깝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러니까 말고기를 쇠고기인 양 파는 행위를 빗댄 것이다.
또 다른 뜻은 장사꾼이 저희 패거리를 손님 속에 섞어놓아 흥정과 속임수에 유리하도록 작용시키는 것을 일본에서는 사쿠라라 한다. 사쿠라 꽃잎처럼 흩어 놓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사쿠라는 프락치 또는 박쥐와 비슷한 존재로, 내부에서 상대편에 유리하도록 모략하거나 진짜가 아닌 것이 진짜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정계에서는 한때 ‘사쿠라 파동’으로 야당의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파란이 있었고, 지금도 심심찮게 사쿠라 논쟁이 일고 있어 그 생명력이 무던히 질긴 듯하다. 
1960년대는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월혁명으로 막이 올라 5ㆍ16 군사쿠데타로 역전되는 이른바 개발독재의 연대로 기록된다. 혁명공약인 민정이양은 결국 ‘공약(空約)’으로 변절되어 박정희 소장은 강원도 지포리의 전역식에서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 없기를” 후배군인들에게 충고(!)했다. ‘불행한 군인’이란 말은 한때 대단한 위력으로 시니컬하게 유행되어 절대 권력자를 조롱했다.
격심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청소년들은 갖가지 은어를 써서 기성층에 도전했다. 60년대 중반기에는 어린이들이 쓰는 언어가 1천여 가지나 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꼰대(선생, 아버지)’ ‘깔치(애인)’ ‘형광등(신경이 무디고 느린 사람)’ ‘이거 되겠습니까?’ ‘좋아하시네’ ‘왕창’ ‘아더메치’ 같은 속어가 거침없이 사용되었다.
‘아더메치’란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라는 것의 줄임말로서 이후의 ‘잘났어, 정말’이란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냉소와 야유 섞인 경멸의 용어였다.
정계에서는 박정희의 3선개헌과 더불어 공화당 내에 서명파와 비서명파로 갈라져 내분이 일었으며, 야당의원 3명이 개헌지지 성명을 발표하여 변절자의 낙인이 찍히고, 여야 공히 ‘주류’ ‘비주류’가 나타났으며, 공화당엔 ‘신주류’에 이어 ‘4인방’이란 계파가 생겨 이것이 일반적으로 짝짓기의 용어가 되었다. 
주류ㆍ비주류란 용어는 술꾼들 사이에도 번져 술만 마시는 사람은 주류, 안주만 먹는 사람은 비주류로 분류될 만큼 유행성이 강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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