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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칼럼> 한일 청구권자금이 ‘한강의 기적’ 기여?… 황당한 법원판결
  • 김주언 논설주간 newmedia54@dailysportshankook.com
  • 승인 2021.06.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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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이 국제중재 또는 국제재판 대상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 사법신뢰에 손상을 입게 된다. 패소하는 경우 대한민국 사법부 신뢰에 치명적 손상을 받게 된다.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된다.  결국 한미동맹으로 안보와 직결돼 있는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진다. 헌법상 ‘안전보장’을 훼손하고 최고 사법신뢰의 추락으로 헌법상 ‘질서유지’를 침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기업 상대 개인청구권 소송을 각하한 판결문의 일부이다. 판결문은 영유권 주장과 위안부 사안, 강제징용 사안 등이 일부라도 국제재판에 회부되면 대한민국으로서는 모든 사안에서 승소해도 얻는 것이 없거나 국제관계의 경색으로 손해인 반면, 한 사안이라도 패소하면 국격 및 국익에 치명적 손상을 입을 것이 명백하다고 했다. 법원 판결문이 아닌 정치인의 주장을 읽는 것 같다. 그것도 극우 정치인의 일방적 예측을 닮아 공감을 얻기도 어렵다.

그래선가. 대법원 판례를 뒤집는 판결이 나온 뒤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재판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김양호 재판장을 탄핵해야 한다는 청원이 게시돼 30만명을 넘는 동의를 얻었다. 고등법원장도 반론에 가세했다.  양대노총 등 시민사회의 비판도 터져 나왔다. 대법원이 2018년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뒤 많은 피해자들이 비슷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급심 재판부는 새로운 대법판결이 나올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각하 판결이 나온 뒤 보수언론은 “일본과의 협의를 거쳐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정치인은 법원 판결로 꽉 닫혀 있는 일본과의 대화 길이 트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판결이후 영국에서 열린 G7회의에서의 약식 한일회담도 불발됐다. 일본언론의 지적이 맞은 셈이다. 니흔게이자이신문은 “항소심에서 다시 일본기업에 배상명령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다른 소송에서 패소한 일본기업의 한국내 자산 현금화 절차가 진행중이므로 이번 판결이 한일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법리적 문제를 떠나 정치적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판결문 곳곳을 들여다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을 빼닮은 내용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흡사 뉴라이트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청와대 청원인의 주장처럼 “반민족적 판결”로 볼 수밖에 없다. 독도를 명기하지 않고 ‘대한민국 영토중 한 도서지역’으로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판결의 근거로 제시한 ‘청구권 소멸론’은 일본 극우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왔다.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내용은 일본 자민당 정권의 주장과 일치한다. 일본 정부가 과거사 배상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내세운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한일협정으로  ‘국가 대 국가의 배상권’은 소멸됐지만, 개인이 일본정부나 일본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1991년 일본 외무성 보고서는 한국의 개인청구권은 유효하다고 시인했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개인청구권 이행을 정당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한국 국민이 일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해 갖는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할 수는 없으나 소송으로 행사하는 건 제한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한일협정 당시 청구권대상에 ‘징용된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등 청구권’도 분명히 포함돼 있었고, 양국도 이를 인식했다”고 지적했다.
청구권협정으로 인한 보상금이 한국경제에 기여했다는 믿기 어려운 주장도 등장한다. “청구권협정으로 타결된 3억달러가 과소하고 당시 대한민국이 요구한 금액과도 현저한 차이가 나지 않는다. (…) 당시 한국의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이 판결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결을 내놓은 사법부가 한국법원이냐는 비아냥마저 나온다. 뉴라이트 친일세력에 대한 비난과 궤를 같이 하는 여론이다.
재판부는 국제법으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사례가 없다는 지적도 내놓았다.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불법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한 대법판결은 식민지배와 징용의 불법을 전제로 한 국내법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청구권협정은 조약이므로 대법판결로 손해배상청구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재판부는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방법으로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안된다’는 비엔나협약 27조를 근거로 내세웠다.
현직 법원장이 반박하고 나섰다. 황병하 광주고법원장은 “재판부가 국제법을 근거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제법은 동등한 관계에서의 국가 사이를 규율하는 법이고, 강점기 당시 한일관계는 불평등한 관계였기 때문에 국제법을 적용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힘으로 다른 나라를 합병하는 문제를 놓고 국제법상 불법여부를 따지는 것은 난센스라는 지적이다. 황법원장은 “강제로 일을 시키고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으면 국내법이건 국제법이건 법질서에 위반된다”고 강조했다. 강제징용 피해는 ILO협약 위반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반인도적 범죄로 국제법상 불법에 해당한다.
황당한 판결에 대한 비판여론이 폭발했다. 주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 김양호 부장판사가 비판대상이다. 김판사의 탄핵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30만명을 훌쩍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정치권도 비판에 나섰다. 민주당 송영길대표는 “조선총독부 경성법원 소속 판사의 판결인지 의심이 간다”고 비꼬았다. 백혜련 최고위원은 “왜 판사가 국제정세를 걱정하고 대한민국 국격을 따지며 판결하느냐. 왜 재판부가 역사를 재단하느냐”고 지적했다. 법원공무원노조는 “왜곡되고 편협한 역사관을 넘어 반민족적 반인륜적 철학과 소신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법부의 이번 판결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상처를 또 한번 헤집었다. 법정이 한가닥 희망마저 좌절로 바꿔버린 비인도적 처사이다. 게다가 판결문을 보면 국민이 용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임에 분명하다. 상급심에서 조속하게 바로잡혀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도 즉각 항소에 나섰다. 피해자 2명과 유족 73명은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들은 “먼 이국땅에서 노예 취급받고 가족을 그리며 하루하루 가슴을 움켜지고 지냈을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가슴이 아린다”고 호소했다.
잘못된 판결은 상급법원에서 바로잡힐 것이다. 그러나 법원에조차 뉴라이트의 왜곡된 역사관이 침투해 판결문으로까지 작성된 데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뉴라이트의 친일사관이 더이상 극소수 일부세력의 외로운 주장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널리 침투해 있음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 못지않게 잘못된 역사관이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절실함이 필요한 때이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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