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의 대명사’ 이승엽, 그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위대한 2인자’ 심정수

‘홈런의 대명사’ 이승엽, 그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위대한 2인자’ 심정수

  • 기자명 이한주 기자
  • 입력 2019.04.26 15:07
  • 수정 2019.04.2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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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홈런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심정수 <사진=연합뉴스>
KBO리그 홈런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심정수 <사진=연합뉴스>

[데일리스포츠한국 이한주 기자] 현재 KBO리그 대표 홈런타자는 키움 히어로즈 박병호다. 2012년과 2013년 31개, 37개를 치며 연속 홈런왕에 오른 그는 2014년과 2015년엔 52개와 53개를 터뜨리며 50홈런 시대를 다시 열었다. 그 후 아직까지 50홈런 이상을 친 타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박병호 이전 KBO리그에 50홈런 시대를 열었던 타자는 ‘전설’ 이승엽(은퇴, 전 삼성 라이온즈)이다. 이승엽은 99년 54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KBO리그 최초로 50홈런 고지를 넘겼으며 이후 전성기를 맞은 2003년엔 56홈런을 치며 당시로선 아시아 홈런 최다 신기록을 작성했다. (2013년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60홈런을 치며 갱신)

이러한 활약 덕분에 통산 최다 홈런(467개)과 통산 최다 타점(1498점) 등 KBO리그에 수많은 기록은 이승엽의 차지였고 그가 KBO리그에 이별을 고했던 2017년 10월 3일 그의 은퇴식엔 많은 이들의 축복과 눈물이 함께했다.

이런 이승엽에 대항했던 유일한 라이벌이 있다. 전성기 시절, 이승엽보다 팀 기여도는 더 뛰어났지만 단 한 번도 이승엽을 넘어선 적이 없는 비운의 선수, 바로 '헤라클레스' 심정수다.

동대문 상고 출신 심정수는 고교 시절 뛰어난 내야수로 주목받았다. 특이하게도 당시 보디빌딩을 하는 친구들로부터 근육 만드는 법을 배워 감자, 달걀 흰자, 우유 등을 먹으며 일찌감치 몸을 키웠다. 당시 이런 웨이트 트레이닝은 야구계에서 ‘야구선수는 유연해야 한다’, ‘웨이트를 많이 하면 유연성이 떨어져서 수비가 망가지고 부상이 많아진다’ 등의 이유로 기피하던 운동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체계적인 운동 덕분에 몸은 불린 심정수는 미래의 거포 감으로 촉망받았고 고교 2학년 때부터 OB 베어스에서 꾸준히 러브콜을 보냈다. 결국 한양대학교로의 진학과 프로 입단 사이에서 고민하던 심정수는 최종적으로 프로 입단을 선택했다.

1994년 2군에서 적응기를 지닌 심정수는 1995년 부임한 김인식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공포의 8번 타자'로 성장했다. 김인식 감독은 심정수에게 "삼진을 당해도 좋으니 큰 스윙을 하라"고 주문하며 수비 포지션도 3루수에서 비교적 수비부담이 적은 외야수로 고정했다.

지시에 순응한 심정수는 116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82, 21홈런, 59타점을 올리며 '공포의 8번 타자'로, 수비에서는 강견의 외야수로 거듭났다. 당시 장타율(0.508)은 팀 선배이자 그 해 홈런왕 겸 MVP였던 김상호(0.474)보다도 높았다. 소속팀 베어스가 그 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심정수는 성공적인 1군 데뷔 시즌을 보냈다. 

개인적인 문제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던 1996년과 1997년을 거쳐 98년 심정수는 KBO리그에 길이 남을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했다. 타이론 우즈, 김동주와 형성했던 이른바 '우동수' 트리오의 탄생이었다. 2000년까지 이어졌던 ‘우동수 트리오’는 가공할 위력을 과시했다. 1998년 399안타, 85홈런, 265타점을 합작해 낸 것을 시작으로 99년에는 424안타, 87홈런, 300타점. 2000년에는 448안타와 99홈런, 308타점을 올리며 기염을 토했다.

심정수는 1999년 장타자를 판단하는 주요지표인 OPS(장타율+출루율)가 1.014에 도달 했다. 뿐만 아니라 잠실 라이벌 LG 트윈스와의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는 4차전부터 6차전까지 승부를 결정짓는 3게임 연속 결승홈런을 치기도 하며 ‘우동수 트리오’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선수협회 결성 관련 문제로 구단의 눈 밖에 난 심정수는 2001년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됐다. 김용달 타격코치의 도움으로 홈런에 특화된 타격폼으로 자세를 바꾼 심정수는 현대에서 4년간 133홈런을 치며 본인의 전성기를 맞았다.

날개를 단 심정수는 2002년 0.321의 타율과 46홈런, 119타점을 올리며 맹활약했다. 하지만 이 시기 KBO리그엔 이승엽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심정수는 홈런왕과 타점왕을 모두 이승엽에게 내주며 아쉬운 한 해를 보내야 했다.  

절치부심한 그는 2003년 0.335의 타율과 53홈런, 142타점을 올리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출루율(0.478)과 장타율(0.720) 모두 리그 1위였으며 OPS는 1.197에 달했다. 팀 기여도를 알 수 있는 WAR(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도)도 11.033으로 MVP에 충분히 선정될 수 있는 활약이었으나 이번에도 그의 앞에는 이승엽이 있었다.

2003년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친 두 주인공 심정수(좌)와 이승엽(우) <사진=KBO>
2003년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친 두 주인공 심정수(좌)와 이승엽(우) <사진=KBO>

2003시즌은 그 어느 해 보다 치열한 홈런왕 경쟁이 펼쳐진 한 해였다. 두 주인공이었던 심정수와 이승엽은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대결을 펼쳤다. 심정수는 53홈런을 날리며 분전했지만 결국 56홈런을 치며 아시아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운 이승엽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단순히 홈런왕을 내준 게 끝이 아니었다. 리그 MVP마저 이승엽에게 내줬다. 이승엽의 WAR은 9.084로 심정수(11.033)에 미치지 못했고 타율, 출루율, 장타율도 심정수가 앞섰다. 심지어 그 해 한국시리즈의 우승팀은 심정수의 소속팀 현대였지만 결국 심정수는 이번에도 이승엽을 넘어서지 못했다.

2005년, 심정수는 4년간 최대 6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삼성 라이온즈에 새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라섹 수술 후 시력저하의 후유증과 왼쪽 무릎, 오른쪽 어깨의 고질적인 부상으로 구단의 기대만큼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005년에는 시즌 초반 활약하며 타율 0.275과 28홈런, 87타점을 올렸지만 후반기에는 부상으로 인한 부진이 심해졌다. 2006년에는 무릎과 어깨 수술을 결정하며 재활로 한 해를 보냈다.

2007년 심정수는 타율은 0.258에 그쳤지만 31홈런과 101타점을 올리며 마침내 본인 커리어 처음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2007년은 심정수의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2008년 부상으로 22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친 심정수는 라이벌이었던 이승엽이 성대한 은퇴식으로 모두에게 축하 받으며 퇴장 할 수 있던 것과 대조적으로 쓸쓸히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파워를 상징하는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홈런타자의 대명사로 이승엽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50홈런 시대를 열었지만 결국 이승엽을 단 한 번도 앞서지 못했던 심정수는 2인자임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승엽이라는 전설과 비교 했을 때 2인자였지, 그가 세운 발자취는 모두 한국 야구역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비록 1인자는 되지 못했지만 심정수가 '위대한 2인자'로 불릴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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