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냐 평등이냐

자유냐 평등이냐

  • 기자명 오세영 교수
  • 입력 2022.12.0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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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촌이 — 그것도 가까운 친척이 논을 사는데 왜 아무 상관없는 내 배가 아프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인륜이란 측면에서 남이 잘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축하를 해 주어야 마땅할 도리이고 또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그가 부자가 되면 —그의 친척인— 내가 혹시 어떤 곤궁한 처지라도 빠질 경우 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이라면 이는 ‘배가 아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고 축하해주어야 할 사건이다.

혹시 나는 너무 가난하게 사는데, 전부터 이미 부자로 살고 있던 그가 이제 더 큰 부자가 된다는 현실이 못마땅해서 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비록 비이성적이기는 하나— 인간의 본성엔 원래 질투, 시기, 이기주의 같은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이유의 자 잘못이 무엇이든 이 속담에는 기본적으로 ‘나는 그보다 못살아서는 아니 된다’, 혹은 ‘그는 나보다 더 잘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말은 ‘그와 나는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혹은 ‘인간은 원래 평등하다’는 가치관의 속된 표현은 아닐까.

그렇다. 인간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의 민주주의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필자가 자랄 때는 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룩해서 그런지 요즘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표어이다. 다만 지난 정권 시절 새삼스럽게 등장한 가령 ‘사람이 먼저다’와 같은 정치구호가 이와 동일한 뜻의 표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의 절대 불문율로 전제되어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은 그 누구도 민주주의 기본 원리가 자유와 평등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역사적으로 오늘의 민주주의를 개화시킨 프랑스의 대 시민혁명의 이념이자 지금도 프랑스 국기에 상징적으로 제시된 색깔이 아닌가.

그러므로 누가 그 무슨 거창한 이론, 현묘한 철학으로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오늘날 이 지구상의 민주주의란 —자유민주주의든, 인민민주주의든— 그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이 한마디로 인류의 삶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치를 가장 이상적이고도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데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이외의 다른 어떤 주장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가게도 여기에는 현실적으로는 풀기 힘든 문제 하나가 가로놓여 있다. 이 두개의 가치란 서로 모순이 되는 관계에 있어 이를 완벽한 등가성 —완벽한 동등성—으로 실현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평등을 훼손시킬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완벽한 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동산 매매에 절대적 자유를 허락하면 수 많은 무주택자를 양산시켜 서민들의 주생활住生活이 불평등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결코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이 문제된다. 즉 자유를 보다 중시할 것인가, 평등을 보다 중시할 것인가. 이 양자 중 그 어떤 것을 우선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필자는 물론 이 분야의 전공 학자도 아니고 또 세계적인 대 석학들이 그 동안 고뇌하여 그들 나름으로 이미 여러 해답들을 내려 놓은 명제이기도 하니 그것을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소박한 상식인의 생각으로는 역시 평등보다 자유가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평등 없는 자유는 가능하지만 자유 없는 평등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발달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경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프랑스 시민혁명도 절대 왕정의 전제를 무너뜨리고 자유를 획득한 연후에야 비로소 평등의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었던 것이지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평등부터 실현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자유는 일차적이지만 평등은 이차적이다.

둘째, 삶의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평등이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타고난 인간의 본성 즉 재능, 성격, 능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평등해 지지위해서는 앞서가는 자는 자제시키고 뒤쳐진 자는 밀어주는 강제성이 작용되어야 한다. 가진 자의 부는 억제하고 결핍된 자의 가난은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즉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를 관리 혹은 강제하는 제도나 계급의 대두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계급이 아이러니하게도 평등을 무너뜨린다. 과거 소비에트 러시아를 보라. 공산당과 이에 기생하는 관리들의 특권사회가 아니었던가.

셋째, 자유를 제한하고 평등을 강요할 경우 인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퇴보할 수 밖에 없다. 퇴보라는 말이 너무 공격적이라면 최소한 정체될 수 밖에 없다. 왜냐 하면 인간의 본성엔 이기주의라는 심리적 동기가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윈이 말하는 적자생존이나 진화, 혹은 고대의 헤라클레이토스나, 근대의 니체가 삶이라는 것 자체가 의지 혹은 자아실현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고 노력하고 연구한다. 사회를 위하는 것은 2차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그 이룬 성과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것이 된다면 그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는가.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것을 구 소련과 이를 추종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에서 이미 확실하게 목도한 바 있다.

이 세계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평등한 사회의 건설이라는 관념적 대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소위 플로레타리아 혁명을 주도했으나 인간 본성이 원래 자아(ego) 혹은 이기심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이데올로기 혹은 교육을 통해서 이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일몽이다. 아직도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실상을 보라. 중국이 어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국가인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한국보다 미국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 일당 독재의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넷째, 평등이란 하향 평등시키기는 쉽지만 상향 평등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비록 그것이 이상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이에 대한 노력을 강제하기는 하나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인민을 어느 수준 이상 상향평등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정부가 전체 중고등학교를 평준화시키니 모든 학생들의 실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지 않던가. 모든 학생의 성적을 평균이하로 평등하게 조절할 수는 있겠으나 모든 학생들의 성적을 평균보다 상향된 수준으로 평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싫지만 우리는 이같은 인간의 본성 혹은 인간의 재능을 인정해야 한다. 이에 동의해야 한다. 모든 인민을 가난하게 평준화시킬 수는 있으나 모든 인민을 평등하게 부자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그것이 타고난 인간의 한계이며 인간 조건이다.

오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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