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기

서 있기

  • 기자명 오세영 교수
  • 입력 2022.10.1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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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떤 때 가장 사람다워 보이는가.

멋진 옷을 입을 때, 그럴듯한 말을 할 때, 세련되게 행동을 할 때, 매력적인 표정을 지을 때 그러한가. 아니다. 사람은 똑 바로 서 있을 때 사람답다. 굽히지 않고, 기울지 않고, 비틀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그런 사람이 사람다워 보인다.

앉아 있기를 좋아 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가능한 한 편안한 회전의자에, 흔들거리는 안락의자에, 포근한 소파에 앉아서 담소나누기를 즐긴다. 가능한 한 자신은 편한 자세로 높이 앉아서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일을 시키고 싶어 한다. 거들먹거리고자 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잘 봐달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앉아 있기 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누워 있기다. 서 있기 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만 앉아 있는 것 보다는 누워 있는 것이 더 편한 까닭이다. 따뜻한 온돌 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무협 만화를 뒤져 보아라. 폭신한 침대에 베개를 베고 누워 텔레비젼의 스포츠 중계를 시청해 보아라. 누워서 떡먹기란 말도 있다. 옛 로마 황제는 침대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조신들의 하례 받기를 좋아하였다. 옛 조선의 왕들도 비단 보료에 기대기를 즐겨하였다. 앉는 것이 서는 것 보다 더 높은 자리라면 눕는 것은 앉는 것보다 더 높은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앉기를, 눕기를 좋아하지 마라. 대지에 가깝도록 자신의 몸을 추스린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가 스러지고 생명이 쇠락하는 모습이다. 당당한 존재가, 건강한 생명력이 앉거나 눕고자 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어디 힘 있는 자가 쓰러져 딍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안방의 가구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면 부셔서 쓰레기로 버리지 않던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인간에 비할 때 네 발이 있어야만 겨우 서는 동물은 턱 없이 미약한 존재이다. 인간 보다 더 강한 육체의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전히 하늘을 바래 서 있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인간의 지배를 받는다. 아예 발이 없는 벌레는 또 어떤가. 그들은 숙명적으로 대지에 몸을 붙여 살고 전혀 서지를 못하는 까닭에 인간보다도 저열한 동물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 그러므로 바닥에 빌붙지 말 진저, 땅을 밟고 당당히 서 있어야 인간이다.

당당히 선다는 것은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 서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 천문(天文)과 이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그것을 글자로 창조하신 우리의 세종대왕께서도 우주의 핵심을 이루는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삼재(三才) 중 하늘과 땅은 각각 ‘‧’와 ‘ㅡ’로 형상화 하셨으되 사람만큼은 유독 ‘l’로 형상화하시지 않았던가. 이 ‘l’의 오른 쪽에 ‘‧’를 붙이면 ‘ㅏ’자가 되고 왼쪽에 붙이면 ‘ㅓ’자가 되는 것이니 자고로 인간은 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하여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우러르는, 아니 머리로 하늘을 지고 사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 ‘l'는 무언가가 곧게 수직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그는 대지처럼 수평으로 누워 있지 않는다. 그러니 한글 모음의 핵심이 되는 글자 ‘l’는 분명, 당당히 홀로 대지를 딛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인간의 형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인간은 원래 그래야 한다. 그래서 한자어 인 ‘人’도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이 지상의,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들은 결코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 아니 바라보려 하지도 않는다. 네 발로 걷는 짐승, 땅위를 기는 벌레, 헤엄을 치는 수중 생명은 결코 하늘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대지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서 있기보다 앉아 있기를, 앉아 있기 보다는 눕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짐승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 인간됨을 포기하고 스스로 대지에 스러져 일개 미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노쇠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한번 살펴보아라. 노년에 이른 사람은 서있기 보다 앉아 있기를, 앉아 있기보다 누워 있기를, 마침내 누워서 살 수 밖에 없는 그 시점에 그는 드디어 임종을 맞게 되는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도 흘러서 바닥으로 스며드는 죽음의 물도 정작 생명의 물이 되기 위하여는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 오르지 않으면 된다. 하늘로 올라야만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실 수 있지 않는가. 우리는 봄 되어 위로 위로 일어서는 물을 본다. 마른 흙을 헤치고 하늘로 하늘로 솟아 오르는 새 순, 새벽 잠자리에서 참을 듯 참을 듯 벌떡 일어서는 사내의 그 새파아란 힘 줄 같이 위로 위로 뻗쳐, 마침내 터트리는 꽃물도 일어서야 생명을 키울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일어서지 않고 사는 삶이란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언제부터인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모두 땅을 바라고만 산다. 대의를 바라보지 않고 코앞의 이득만을 취하며 산다. 짐승이 그 주둥이를 흙에 대고 하루 종일 먹거리를 찾아 헤매듯 매일 매일 아니 한 평생을 이 지상에 코를 대고 물질의 냄새를 맡으며 산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 사회가 정의도 불의도, 진실도 허위도 그 구분이 사라진 요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사람은 똑 바로 서 있을 때 사람답다. 굽히지 않고, 기울지 않고, 비틀대지 않고 꼿꼿이 하늘을 바라보고 살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런 정치인이 훌륭한 정치인이다.

 

삶이란

중력을 거스르는 일,

봄바람에 피어나

위로위로 솟는 새싹처럼……

 

죽음이란

중력에 내맡기는 일,

팔랑

갈바람에 떨어져 아래로 아래로

나뒹구는 낙엽처럼……

 

- 오세영, ‘바람불다’

오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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