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와 부산교육청, ‘영어상용화’ 중지해야

부산시와 부산교육청, ‘영어상용화’ 중지해야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9.2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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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0월 9일의 한글날은 근래 없이 우울한 기념일이 될 것 같다. 최근 부산시교육청과 부산시가 ‘글로벌 영어상용도시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활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윤수 교육감과 박형준 시장은 지난 지방선거 기간 중 이를 공약으로 제시했던 것이라 한다.

박 시장은 8월 18일 기자회견에서 “2030년 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만들기 위한 요건 중의 하나로 영어사용에 불편함이 없는 환경과 편리한 외국인 정주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서 ‘영어상용도시’ 건설을 역설했다.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반발이 없으면 그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국어 관련 76개 단체와 34개 시민단체가 연합체를 조직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저지에 나섰다. 부산시는 ‘영어 상용화(Common Language)’는 영어를 공식언어로 쓰는 영어 ‘공용화(Official Language)’가 아니라고 내세운다.

영어의 상용화든 공용화든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 부산시가 그것도 부산교육청과 손을 잡고 외국어를 상용화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국제화 시대이고 영어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지방자치 단체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언어정책은 국책사업으로 민족 만대를 내다보면서 신중하고 국민의 여론을 들어가면서 결정해야 하는 과제이다. 결코 1개 지자체와 교육청이 설혹 선거공약이라 해도 함부로 결정하고 실행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부산시장이 내세운 이유 중에는 ‘2030 부산세계박람회와 외국인 정주환경’을 들고 있다.

한시적인 박람회를 위해서 모국어에 치명적인 위해가 될 특정 외국어를 상용화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소아병적인 사고이다. 국민에게 우리 말과 글은 단순한 언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은 오래 전에 대륙민족이나 왜족에 동화되고 말았을지 모른다. 만주족ㆍ여진족ㆍ말갈족 그리고 일본에 합병된 류우쿠우족처럼 말이다.

한글은 지난 700여년 동안 한민족의 정체성이고, 분단 77년이 되는 지금 남북 겨레의 공유점이다. 남북 8천만 겨레와 해외교포ㆍ교민 800만의 원형질이다. 이 원형질은 한국어(조선어)를 통해 공유된다. 세계 200여개 국가 중에서 우리가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한 언어는 한국어뿐이다.

세종임금이 1443년 12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많은 책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특히 의서ㆍ농서 등 백성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교훈서 등이 많았다.

군왕이 ‘훈민정음’을 창제ㆍ반포하였지만 막상 지배층에서는 19세기까지 언문(諺文)이라 비하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글로 치부되었다. 말(언어)은 한국어로 하면서 글(씨)은 한문으로 쓰는 실정이었다. 양반 지배층은 여전히 한문(한자)을 자신들의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글이 백성들과 공유되는 것을 저지하였다.

한글의 수난사는 책으로 써도 여러 권이 될 정도로 극심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언문’의 사용과 학습을 금지하고 언문 서적을 불태웠다.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한글을 말살시키고자 온갖 책동을 일삼았다. 미군정은 초기에 한국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케 하려 들었다.

지금은 다른 형태로 한글이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배우고 대학 졸업 때까지, 대부분 취직용으로 영어에 매달리는 세태가 되었다. 힘이 센 자들은 미국 등 영어권 나라에 가서 출산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병역 기피의 목적도 따른다.

‘훈민정음’은 우리민족 최고의 발명품임과 동시에 겨레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일깨워 주는 상징이며, 문화유산이고 현재와 미래의 가치이다. 유엔(UN) 산하 유네스코는 1990년부터 해마다 문맹 퇴치에 공이 많은 개인이나 단체에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주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대왕의 공포문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의 해설 및 해례를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몇 해 지난 일이지만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세계 각국의 언어를 분석한 결과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을 기준으로 선정한 문자 순위에서 한글이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인으로 ‘한글의 탄생’을 쓴 디자인 연구가 노마 히데끼는 한글 지형의 과학적 조형성을 극찬하면서 한글을 ‘세계문자 역사의 기적’이라며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찬탄했다.

한글은 컴퓨터나 휴대전화 문자입력에서 한자나 일본어보다 7배가량 빨라 중국과 일본에 대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일조한다. 문자입력 속도는 정보검색과 전송 속도를 결정하며, 이 속도는 지식정보화 시대의 개인과 기업, 나아가 국가 경쟁력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영어의 위력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ㆍ국제화시대에 ‘세계공용어’가 되다시피 한 영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필요하고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모국어에 앞서, 모국어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영어를 배우고 상용하려는 것은 지자체가 취할 정책이 아니다. 미국이나 영어권 나라로 이민을 가겠다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자치단체로서 영어를 상용하는 정책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한때 중국(중원)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대제국 청나라를 세우고도 문화적으로 한족에게 동화되어 자신들의 언어인 만주어 대신 중국어를 상용하였다. 그 결과 만주족은 종족으로서는 존재하지만 언어를 잃고 마지막에는 민족이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만주어는 현재 중국 동북부 오지의 노인 7, 8명만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모국어를 잃으면 민족이 소멸되는 경우는 만주족 외에도 아시아ㆍ유럽ㆍ아프리카의 몇 족속이 더 있다.

한글문화연대가 17개 지자체의 최근 2개월 치 보도 자료를 검토한 결과 부산시가 외국어 남용 자료의 비율이 1위를 차지했다. 낱말 1000개 가운데 부산의 외국어 사용 횟수는 울산의 거의 6배에 이르렀다. 광안대교를 다이아몬드 브릿지, 달맞이길을 문탠로드로 바꾸는 경우를 든다. 부산시의 영어 상용화 추진이 공용화로 다시 전용화로 변하기 전에 초장에 막아야 할 것 같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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