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순국 112주년 추모의 글

안중근의사 순국 112주년 추모의 글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3.2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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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은 안중근의사께 큰 빚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어찌할 수 없었다 치더라도, 광복 77년 동안 입으로는 안 의사를 칭송하고, 빈 무덤에 회칠하는 식의 거창한 추념 행사를 하는 등 형식에 치우치고, 정작 의사의 정신과 행동을 기리는 일은 소홀했습니다. 친일세력과 불의한 자들에게 정의의 총탄, 즉 ‘의거’의 재현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중근의사는 조선의 장부로서 우리 동포는 물론 중국ㆍ러시아 인민과 지도자들의 우러름을 받고, 국경과 이념을 초월하여 사표가 되셨습니다. 
중국의 국가주석 원세개는 “몸은 한국에서 있었어도 만방에 이름 떨쳤소. 살아서는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년을 가리”라 추앙하였고,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은 “공훈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년을 드리우리”란 조사를 지었습니다. 
5.4운동의 지도자 진독수는 ‘청년잡지’ 창간사에서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나 타골이 되기보다 콜럼버스나 안중근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중국청년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로 추앙하고,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저서 ‘제국주의에 대한 노트’에서 “일본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는 한국민족의 용맹성과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은 20세기 초반기 세계사적인 중요한 대사건의 하나”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인물에는 과거완료형, 현재진행형, 미래지향형이 있다면 안중근 의사는 현재진형이고 미래지향형입니다. 안 의사의 교육사상, 실천종교, 의병전쟁, 단지동맹, 국적 이토 처단, 공판투쟁, 동양평화론은 하나같이 과거완료형이 아닌 우리가 새겨야 할 겨레 유산이고, 본받을 현재진행형이고, 추진해야 할 ‘지나간 미래상’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석가모니를 모시고 마호메드를 섬기는 것은 과거행적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담보하는 신앙에 있듯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것은 과거와 함께 현재와 미래의 가치에 있듯이,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의 비전이고 가치관입니다.
북한의 경우 1928년 김일성 장군이 무송일대를 돌면서 항일전을 벌일 당시 스스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란 극본을 써서 공연할 만큼 존경심이 높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는 앞에서 열거한 대로입니다. 남북에서 함께 존경받는 대표적인 분이고, 향후 통일과정에서 가장 앞줄에 모셔야 할 지도자입니다.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이 대를 이어 안 의사를 흠모하고 더러는 신위로 모시기도 합니다. 그것은 안 의사의 높은 인격과 신앙심, 행동하는 양심, 평화사상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안 의사의 이토 처단은 개인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거악으로 상징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의 심장을 겨냥한 것이고, 덧붙이면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거사로써, 인류보편적 가치인 양심과 선을 실행하려는 숭고한 정의의 실현이었습니다.
흔히 ‘역사가 된 역사학자’로 불리는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는 심판과 감계(鑑戒)이다”라고 했거니와, 안 의사께서는 현장에서 일본제국주의 원흉, 전쟁광, 악의 상징을 심판함으로써,  정의와 진리와 선의 실천의 중요성을 교훈으로 남겼습니다.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저술한 미완성 ‘동양평화론’의 내용만 하더라도 국제연맹 창설보다 훨씬 앞서고 유럽연합(EU)보다는 수십 년을 앞서 제시한 평화사상이고, 독일 철학자 칸트의 국제평화론보다 구체적인 실천논리를 담았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고 현실적인 대안이며 ‘지나간 미래상’이라 하겠습니다.한국ㆍ북한ㆍ중국ㆍ러시아ㆍ일본의 시민ㆍ학자들이 참여하는 ‘안중근평화학연구회의’(가칭)의 창설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안중근평화학연구회의’는 학문으로써 연구되고 실천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안 의사의 평화사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 그리고 미ㆍ중의 패권경쟁으로 날이 갈수록 먹구름 짙어가는 동북아의 위기 상황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고 공동체 인식의 씨앗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안중근 의사 112주기를 맞아 서거 다음 날인  당시 중국신문 ‘만주일일신문이 보도한 ‘안중근의 최후’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일제가 통제했던 기사입니다.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여순감옥에서 행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들은 바에 따르면 안은 예정시각보다 일찍 어젯밤 향리에서 온 수의를 입고 간수 4명이 앞뒤에서 경호하여 형장의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우선 끌려갔다. 당일의 수의는 겉옷과 속옷 모두 순백의 조선 명주복으로 바지는 흑색의 같은 조선명주로 만들어 흑백이 선명하게 나뉘어져 있는 바, 아무리 봐도 수 분 후에 명(이세상)에서 암(저세상)으로 가야 할 사형수의 신상과 상응하여 보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감에 젖게 된다. 
드디어 미조부치(溝淵) 검찰관 구리하라(栗原) 전옥 소노키(園木) 통역 기시다(岸田) 서기 등은 교수대의 전면에 있는 검시실에 착석하였다. 
이후 안을 대기실에서 끌어내어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올 2월 14일 여순 지방법원에서 재판언도 확정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한다는 취지를 알리고 소노키(園木) 통역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알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옥은 재차 안에게 뭔가 유언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하였다. 그 말에 안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자신의 행위는 동양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자신의 사후에도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하여 동양평화의 유지를 꾀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때 간수가 반지 두 장을 접어 안에게 씌우고 그 위에 백포를 씌워 눈을 가린 안의 최후는 시시각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판결 언도에 이르기까지 제반 취급에 정중하고 시종 친절하게 대한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에 이르자 한층 관대한 대우를 하여 우선 그에게 마음대로 최후의 기도를 하라고 허가하였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 분간 묵도를 하고 나서 몇 명의 간수의 부축을 받아 교수대에 올랐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중 2층과 같은 것으로 작은 계단 7개를 오르면 그 위에 화덕만 한 크기로 잘라 판자를 덮었다. 
안은 조용히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가는 그 찰나의 감인가 아마도 얼굴색은 백의와 대조적으로 한층 창백해진 것 같다. 
드디어 사형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밧줄이 조용히 그의 목에 걸렸다. 한 사람의 옥리가 그 한쪽 끝을 밟자 판이 꿈틀거리며 뒤집힘과 동시에 교수형은 아무 일 없이 끝났다. 10시 15분 안은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그 시간은 불과 수 분 간이었다. 
 일제, 안정공ㆍ공근의 안중근 유해인도 요구를 거부함.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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