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칼럼] 다시 변절의 계절에

[김삼웅 칼럼] 다시 변절의 계절에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2.22 10:48
  • 수정 2022.02.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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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에 빌붙는 부류에게 변절은 철 따라 바꿔입는 의복보다 더 편리한 행위

“큰 선거를 앞두거나 정치적 변혁이 있을 때 변절자가 줄을 선다. 

대선을 앞두고 다시 변절자들이 나타난다…

일신의 안일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변절은 하나의 삶의 방편이다. 

시류에 빌붙는 부류에게 변절은 철 따라 바꿔입는 의복보다 더 편리한 행위”

큰 선거를 앞두거나 정치적으로 변혁이 있을 때는 변절자가 줄을 선다. 대선을 앞두고 다시 변신(절)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사상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절개를 지키지 않고 바꾸는 행위”라고 풀이한다. ‘절개’란 신념을 굽히거나 변하지 않는 충실한 태도를 말한다.

자유당 말기 ‘지조론’을 써서 절개의 높은 가치를 제시한 사람은 조지훈(趙芝薰)이다. 그는 말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진심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고 명쾌하게 지적했다.

변절은 쉽다. 시류에 따라 세파에 따라 적당히 처신하면서 일신의 안일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변절은 하나의 삶의 방편이 된다. 해바라기처럼 권력만을 따라다니는 사람들, 신념이나 절개를 헌신짝 버리듯 하면서 시류에 빌붙는 부류에게 변절은 철 따라 바꿔입는 의복보다 더 편리한 행위일지 모른다.

우리 근현대사는 정치사회적인 격변을 거듭해 오면서 그때마다 숱한 변절자들의 군상을 지켜보아 왔다. 명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왕조시대와 국난기 한말에도 그랬고 민주주의를 기본가치로 삼는 해방 이후에도 그랬다.

‘오취걸 오취탕(五就桀五就湯)’이라는 고사가 전한다. 옛날 중국에서 이윤(伊尹)이란 사람이 다섯 번 걸주에 나가고, 다섯 번 탕임금께 나갔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이윤은 원래 하남성에서 농사일을 하던 사람으로 뜻을 품고 하(夏)나라에 가서 걸왕을 만나 현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 후 다시 상(商)나라의 탕왕을 만났는데, 탕왕은 이윤의 슬기로움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탕왕은 얼마 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내치고 말았다.

이윤은 전후 다섯 차례나 걸주를 찾아갔으며, 또한 다섯 번이나 탕왕을 찾아갔다. 이윤은 희대의 폭군과 성군의 곁을 번갈아 오간 ‘희대의 변절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세인 누구도 그를 변절자로 매도하지 않는다. 이윤은 소신과 경륜을 폭군과 성군에 따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척구폐요(拓狗吠堯)’라는 말이 있다. 잔학무도한 도척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개는 아무리 자기 주인이 악당이라도 주인이 지시하면 요(堯)와 같은 성인군자에게까지 서슴지 않고 짖어댄다는 뜻이다.

변절자들이 새 장(場)으로 옮기면 그곳 주체들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해진다. 그쪽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헌병ㆍ순사들이 더 가혹했던 것이나 민주진영에서 독재진영으로 변신한 인물들도 같은 이치에 속한다.

변절이라는 독초(毒草)의 뿌리는 깊고 그 폐악은 오래간다. 인간사회에서는 어느 시대나 배신자ㆍ변절자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 석가모니의 사촌, 예수의 제자 유다에서부터 21세기 20년대의 오늘에도 한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자를 비롯 미국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의 망발을 지원하는 등 철저하게 일본 극우의 노선을 대변하는 무리가 있다.

우리에게 변절자의 사력은 아픈 상처의 실존이다. 을사오적이 하나같이 대한제국의 판사 출신이고, 경술칠적은 왕족과 최고위급 관료들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한 다음 매국노 72명에게 일황 명의의 훈장을 주고, 관리 3559명과 양반ㆍ유생 9881명에게 은사금이란 것을 지급했다. 그것도 일본에서 가져온 돈이 아닌 조선의 돈으로 생색을 냈다. 이를 거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생 중에는 서로 받겠다고 아우성쳤다.

우리에게 친일 변절자들의 아픈 실존은 현재의 상처로 남는다. 그 죄과가 ‘변절자 1호’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3ㆍ1절이면 읽어야 하고, 친일에 친나치까지 행적이 드러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각종 행사 때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썼으나 민족대표에 서명은 거부하였다. 문약하여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서대문감옥에서 만기 7개월 전에 출감 할 때 이미 일제의 회유가 시작되어 괴뢰만주국 교수,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사편수위원’으로 위촉되면서 친일의 길을 걸었다. 중추원참의까지 지냈다.

이광수는 ‘2ㆍ8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주필이 되어 최일선에서 일제와 싸웠다. 하지만 2년이 채 안 돼 총독부가 보낸 애인 허영숙을 따라 귀국한다.

기미년 3ㆍ1혁명 준비 과정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최린의 역할은 막중했다. 그 역시 만기 전에 출소하고 이른바 조선의 자치를 목적으로 한다는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하였다. 본격적으로 훼절한 것은 1926년 ‘재외 민족주의자의 후원과 양해를 얻기 위하여’란 명목으로 외국 여행을 떠나면서부터이다. 총독부의 사주에 따라 해외여행을 떠나고 친일파로 변신, 중추원참의에 이어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사장이 되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친일로 변절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매일신보>사장이 된 서춘, 임시정부〈독립신문〉에서 일하다 친일광신자가 된 주요한, 33인 민족대표에서 교회의 종까지 헌납한 정춘수, 민족종교 천도교를 이끌다 천황주의자로 변신한 이돈화, 33인 민족대표에서 친일광신자가 된 박희도,〈동아일보〉창간사를 쓰고 단골 친일연사가 된 장덕수,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내다 불교계 친일원흉이 된 이종욱, 의정원의원 출신으로 ‘유다의 직계’로 전락한 목사 정인과 등이 꼽힌다. 이밖에 언론ㆍ교육ㆍ문학ㆍ음악ㆍ예술ㆍ기업인 출신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친일 변절에는, 일제권력의 각종 공작, 이광수의 사례처럼 일제의 미인계, 총독부의 회유와 감투, 자의 반 타의 반의 전향, 개인적 비리로 약점이 잡혀서 등 여러 가지 사유가 기적된다.

친일변절자들은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한 자를 비롯하여 교회와 사찰의 종, 여성들의 금비녀ㆍ가정의 놋그릇까지 내놓으라고 국민에게 강요하는 연설을 하거나 신문ㆍ잡지에 기고하였다. 철저하게 일제의 황민이 되어 동포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데 동원되었다.

식민지 암울한 시대, 모든 언로가 통제되고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와 비슷한 역할을 한 월간지〈조광〉등에 그리고 강제 동원된 국민들에게 행한 변절자 친일파들의 글이나 강연은 큰 영향을 미쳤다. 달리 정보가 없다 보니 그들의 말과 글을 믿게 된 것이다.

그들의 언설은 하나 같이 내선일체, 충용스러운 황국신민, 굶더라도 식량공출, 젊은 청년은 자진 입대,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지원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한때 독립운동 진영에 섰던 인사들의 시국 강연과 일제를 향한 ‘우국충정’의 언설은 식민지 국민들의 민족혼을 빼앗고 사회정의를 말살시키는데 모자라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한 정신적 후예들의 사대주의근성, 학계 일각의 친일행위 등 영혼이 없는 행각은 그들이 뿌린 잔재에 속한다.

그 시대에도 소수이지만 끝까지 민족정신을 지키며 변절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있었기에, 변절자들의 죄과는 더욱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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