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100년 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1.2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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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의 무대는 중국ㆍ미국ㆍ러시아ㆍ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 이르렀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이면 대표를 참석시켜 독립의 기회를 얻고자 시도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는 가장 많은 대표가 참석하기도 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는 미국 등이 주도한 태평양회의에 맞대응하여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하는 극동민족대회(원동약소민족대회, 제1차 극동피압박인민대회, 근로자대회, 제1회 극동공산주의 단체 및 혁명단체대회로도 불렸다. 여기서는 극동민족대회로 표기한다)를 개최하였다.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기대했다가 크게 실망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이념과 지역, 정파, 국내외를 뛰어넘어 많은 대표가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들은 레닌을 비롯하여 러시아정부 지도자는 물론 각국의 지도자들과 만나 폭넓게 교유하면서 극동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여러 가지 방략을 논의하였다.
코민테른이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날(communist lnternartonal)의 준말로서 1919년부터 1943년까지 존속한 각국 공산당의 연합조직을 말한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것을 국제공산당 혹은 줄여서 국제당이라고 불렀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미ㆍ영ㆍ불ㆍ일ㆍ중 등 9개국이 참가하는 군축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린 이 회의는 아시아ㆍ태평양 일대의 신질서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등 승전국이 주도하였다.
독립운동계의 일부 정치세력은 워싱턴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는 이 회의를 가르켜 ‘한일 양국의 대판결의 기회’ 라고 규정했고, 박은식은 ‘우리 민족의 사활’을 가늠하는 중요한 회의라고 인식했다. 조선에서 간행되는 신문은 물론이고, 중국ㆍ일본의 각종 신문들도 이 회의의 진행 경위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워싱턴으로 나아갈 것인가, 모스크바로 갈 것인가? 독립운동 진영의 각 정치세력이 이 선택의 갈림길에 부딪치게 된 시점은 3ㆍ1혁명으로 촉발된 독립운동의 일대 고조기가 점차 쇠퇴해 가던 1921년 하반기였다.
한국인으로는 여운형ㆍ김규식ㆍ김상덕ㆍ이동휘ㆍ조봉암ㆍ김시현ㆍ김승학 등 총 56명이 참석하였다. 당초 이 대회는 러시아 극동지역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장소가 모스크바로 바뀌었다. 대규모 국제대회를 시베리아 변방에서 여는 것이 기능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모스크바는 1917년 10월혁명 이후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지도자들에게는 ‘혁명의 성지’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국립 크렘린궁전에서 열린 대회의 의결권이나 심의권을 가진 각국의 대표자는 총 144명이었다. 민족별로 보면 한국이 56명으로 35%를 차지하여 가장 많고 중국 42명, 일본 16명, 몽골 14명, 부리아트(재시베리아 몽골계 소수민족) 3명, 인도 2명 등이었다.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이 대회에 그만큼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공산주의 계열, 아나키즘 계열, 노동자 대표, 조선기독교연맹 등 국내외의 각급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이 다투어 참석한 것이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한국의 대표들은 56명이었다. 그러나 자격심사에서 통과한, ‘대회의사록’ 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52명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인사는 여운형을 비롯, 김단야ㆍ김상덕ㆍ김시현ㆍ김승학ㆍ김재봉ㆍ장덕진ㆍ정광호ㆍ조동호ㆍ최고려ㆍ최진동ㆍ현순ㆍ홍범도(가나다 순) 등이 포함되었다. 파견단체로는 고려공산당상해지부, 신한청년당, 고려혁명군, 고려공산당, 조선노동대회, 대한독립단, 대한광복군총영, 조선학생대회, 대한청년연합회, 이르쿠츠크공산청년회, 조선공제단, 대한애국부인회, 조선기독교연맹 등 국내외 각급 항일운동단체가 망라되었다.
1922년 1월 21일 크렘린궁전 내의 극장에서 대회가 열렸다. 회의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한국대표로 의장단에 뽑혔다. 의장단은 5인으로 그 외에 러시아인 지노브예프, 중국인 장국우(張國愚), 그리고 인도인 로이였다. 코민테른의 위원장 지노브예프가 기조연설을 하였다. 그는 특히 한국 인사들의 환심을 사는 데 노력하여 “마치 한국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국가들이 워싱턴에 모인 것 같이 워싱턴회의에서는 코리아란 단어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라고 역설하였다.
여운형도 유창한 영어로 조선독립의 이유와 현재 조선인이 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을 폭로하면서 조선독립을 호소하였다. 2월 2일까지 계속된 대회는 조선문제에 대한 토론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조선혁명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그 정부를 격려하고 수정함으로써 수행되어야 한다. 조선은 공산주의에 지식이 없는 농업국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강조해야하며, 제1차적 목표를 농민에게 두어야 한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전에서 극동민족대회가 개막되던 날, 각국 대표단장은 차례로 연단에 올라 개회연설을 했다. 조선인 참석자들을 대표하여 등단한 사람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파견됨으로써 널리 이름을 떨친 40세를 갓 넘긴 김규식이었다. 
김규식은 미국과 러시아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과거에 워싱턴은 민주주의와 번영의 중심지였는데, 모스크바는 차르의 전제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표상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고 강조했다. 모스크바는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를 이렇게 천명했다.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ㆍ자본주의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고자 기대한다”고, 김규식의 이 연설은 회의장에 모인 140여 명의 각국 대표자들과 수많은 방청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국대표들이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 대회를 취재한 미국인 기자 에반즈(Ernestine Evans :가명)는 미국잡지 ‘아시아’ 1922년 12월호에 상세히 기록하면서 각국 대표중에 한국대표가 가장 열성적으로 보였고, 한국대표들 중에는  ‘혁대를 차고 투지가 양양한 한국 군인들 시베리아의 빨치산 부대원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홍범도와 그의 부하들을 지목하는 것 같다.  
한국 대표들은 레닌을 두 차례 만났다. 그리고 조선독립문제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운형의 증언이다. 
“처음에는 일본인 대표 가따야마(片山潜)와 동반했고 두 번째는 중국인 대표 구추백과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레닌은 먼저 가따야마를 향해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투쟁하겠는가?’ 라고 묻고, 여운형을 향해서는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두 사람이 다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고 대답하자 레닌은 말을 계속하여 ‘다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소련 공산당과 핀란드 공산당은 불화가 생겼었다. 이것은 소련 사람의 우월감 때문이다. 물론 같은 혁명동지라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감정을 초월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서로 이해와 양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다’ 라고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다음날 구추백과 같이 가서 다시 레닌을 만났을 때 레닌은 손문의 혁명운동을 지지하고 자기가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사이 받아보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손문을 적극 원조하겠다는 뜻을 말했다.”
한국 독립 운동가들에게 모스크바 대회는 여러 가지 경험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시아, 극동지역의 민족해방투쟁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은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선물 받았는데, 이를 두고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는 자들이 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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