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마차에 폭탄 던진 이봉창의거 90주년

일왕 마차에 폭탄 던진 이봉창의거 90주년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1.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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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90년 전인 1932년 1월 8일이다. 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 의사는 이날 오전 11시 44분경, 일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하고 경시청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은 일왕이 두 번째 마차에 탔을 것으로 짐작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일왕은 폭사하지 않았다. 수류탄의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국치 22년 만에 대한제국 병탄의 수괴인 일왕을 적의 수도 왕궁 근처에서 폭살하고자 한 대담한 의거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한민족으로서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ㆍ중국ㆍ러시아에서 각종 의열투쟁이 전개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적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은 이봉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23년 박열이 일왕 부자를 폭살시키려는 거사를 일본에서 준비하다가 검거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봉창 의거는 비록 적중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본인은 일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더욱 악랄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불행부중(不幸不中)’ 즉 불행히 적중시키지 못하였다라는 중국의 신문보도를 트집잡아 상하이를 침공했으며, 같은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에 의해 일왕 생일 및 상하이전승기념 축하회장에서 폭탄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나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수료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이 되었다. 이후 용산역의 용원으로 채용되어 역부 노릇을 하다가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 각기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다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8년 11월 교토에서 거행된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구경갔다가 일경에 끌려가 유치장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할 때 그 성실성에 감동된 주인의 양자로 들어가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꾼 뒤 도쿄 등지를 다니면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어서 일본인 비누공장 점원, 해산물 도매상, 요리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29세 때인 1930년 12월 일본 선박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조선인이 차별받고 착취당하는 것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하고자 신문에서 보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상하이로 갔다. 이봉창은 뒷날 재판을 받으면서 상하이로 가게 된 이유를 밝혔다. “나는 2년 정도 일본인으로 변신하여 살아보면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의 본명인 이봉창으로 살기로 하고 차별이나 압박을 받아도 관계가 없는 조선인으로서 생활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때이기도 하여 곧 결심하고 상해로 갔다.”
이봉창은 1931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의 임시정부와 함께 있는 대한교민단 사무실을 찾아갔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하여 임금을 받으면 임시정부를 돕겠다는 생각이었다. 민단의 관계자들은 아무런 소개장도 없이 일본인 행색을 하고 불쑥 나타나 일본어가 반이 섞인 한국말로 떠드는 괴청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밀정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다음날 다시 찾아와 자신의 포부를 거듭 밝혔다. 이를 옆방에서 듣고 있던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가 자기 방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불타는 애국심과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가 일으킨 만보산사건과 만주침략 등으로 악화된 한ㆍ중 양민족간의 감정을 풀고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한인애국단의 구성은 단장 김구와 핵심단원은 안공근ㆍ김동우ㆍ김해산ㆍ엄항섭ㆍ김홍일ㆍ안경근ㆍ손창도ㆍ김의한ㆍ백정기ㆍ김현구ㆍ송두환ㆍ주염ㆍ양동호ㆍ이덕주ㆍ유진만ㆍ윤봉길ㆍ유상근ㆍ최흥식ㆍ이수봉ㆍ이성원ㆍ이성발ㆍ왕종호ㆍ이국현ㆍ노태영ㆍ김긍호ㆍ김철 등이었다. 이봉창도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이봉창은 김구와 몇 차례 만난 자리에서 자기가 교토에서 일왕 즉위식을 구경한 이야기를 하면서 폭탄만 있으면 일왕이 지나갈 때 투척하여 죽이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김구는 이봉창의 구상을 믿었다.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김구는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상하이 병공창 병기주임의 직책을 맡고 있는 김홍일에게 이봉창이 소지하고 갈 폭탄을 제조시켰다. 얼마 후 김홍일은 휴대하기 간편하고 안전하며 또 멀리 던질 수 있는 수류탄 2개를 제조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청사임대료는 물론 중국인 통역관 월급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김구는 미국 교포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마침 하와이국민회 등에서 기금이 들어왔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중국 지폐로 300원을 주며 일본으로 갈 여비와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 달치 임시정부운영자금에 달하는 돈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폭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김구 앞에서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이봉창은 여러 날 걸려 심한 검문검속을 피하면서 도쿄에 무사히 도착했다. 유창한 일본어가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선박비와 여관비 등으로 돈이 다 떨어졌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100원이 더 필요하니 송금해 달라는 전보를 쳤다. 며칠 후 돈이 왔고, 이봉창은 여관을 전전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운명의 날인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히로히토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맞지 않았고 그는 경찰에 붙잡혔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경찰이 한 남자를 체포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자신이 수류탄을 던졌노라고, 자진하여 일경에 붙잡혔다. 뒷날 재판에서 “이런 일(독립운동)을 하면서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국 독립운동가의 당당함을 밝혔다.
일본 메이지(明治)헌법 제1조에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하고, 제3조에는 “천황은 신성으로 침범할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일왕(과 그 일족)에 대한 위해는 대역죄인, 국사범으로 몰아 처형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반 형사범죄가 3심제도인데 비해 대역죄는 대심원의 단심으로 형을 확정하였다.
이봉창은 도쿄 풍다마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9월 16일 대심원 제2특별 형사부 법정에서 재판이 열리고 9월 30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는 순간에도 이봉창 의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일제는 사형선고를 한 이봉창의사를 10월 10일 시곡형무소로 이감하여 당일 오전 9시 교수형이 집행되어 32세의 짧은 삶을 조국광복에 바쳤다. 유해는 도쿄 서북쪽 기옥현 포화형무소 묘지에 묻혔다가 해방 후 환국한 김구 주석에 의해 효창원 3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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