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권운동의 뿌리를 찾는다

한국 여권운동의 뿌리를 찾는다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09.02 09:00
  • 수정 2021.09.2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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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크고 작은 사건ㆍ사태가 쏟아지다보니 이슈에서 묻혔지만, 지난 8월 하순 대법원이 법조경력자를 법관으로 임용하는데 처음으로 법관임용예정자가 여성이 남성을 추월했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법관도 이제 남녀평등 구조가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대법원은 올해 일반 법조경력자 중 법관인사위원회의 최종 심사를 통과한 임명동의 대상자 158명 가운데 여성 82명, 남성 75명으로 첫 역전현상을 보였다. 아직은 여성법관의 비율이 30% 선이지만, 이런 추세라면 법조계도 여성차별의 낡은 봉건성이 걷히게 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약헌(헌법)을 제정하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실정은 도처에서 여성차별이 심화되었다. 지금도 남녀 간 임금격차는 OECD국가 중 최악수준이다. 
지난 7월 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선언’이 발표된 지 12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898년 9월 1일, 이소사(李召史) 등 서울 북촌의 여성 300~400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선언서인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한 것이다. 여성의 평등한 교육권ㆍ정치참여권ㆍ경제활동 참여권의 요구가 담겼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조선의 여성은 마치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과 같다. 여성은 먼저 ‘의식의 병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둘째, 남자와 똑같은 온전한 신체를 가진 평등한 인간인 여성이 어째서 평생 동안 깊은 규중에 갇혀 남자의 절제를 받아야만 하는가. 셋째,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사회진출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들이 남자와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의 역사성을 갖는 ‘여권통문’은 여성들이 천주교의 전래와 동학의 포교에서 남녀평등 의식이 트이면서 시작되었다. 여성들 스스로가 여권을 선언한 데 이어 여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후원 여성 단체인 찬양회(贊襄會)를 조직하고, 이 단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로서 여학교설립과 여성계몽사업을 2대 목표로 삼아 이듬해(1899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순성학교(順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여권운동은 외세의 침략 시기와 맞물리면서 여성선각자들에게는 여권운동과 민족운동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이중(二重)의 질곡과 함께 사명감이 부여되고 ‘역사의 현장’에 등장한다. 
여성들이 ‘역사현장’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는(을미의병), 그때 강원도 춘천의 윤희순은 시아버지와 함께 직접 의병으로 나섰다. 그리고 여성의병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 여성항일운동가 제1호의 기록을 갖는다. 
다수의 여성들이 최초로 역사현장에 참여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이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나랏빚 갚기’ 운동은 곧 전국 각지로 파급되고, 여성들의 주도로 각급 여성단체가 속속 결성되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에 동참하는 여성단체가 조직되었다. 서울 부인 감찬회(感贊會),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 인천 적성회(積成會), 대구 국채보상 탈환회(脫環會), 부산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 삼화항(현 전남포) 패물폐지부인회, 창원항 국채보상부인회, 선천 의성회, 안악 국채보상탈환회, 안성 장기동부인모집소, 진주 애국부인회, 남양 의성회, 김포 국채보상의무소, 제주도 삼도리부인회 등이 그것이다. 감찬회(感贊會)는 반찬 가짓수를 줄여서, 탈환회(脫環會)는 금가락지를 빼서 그 돈으로 나랏빚을 갚자는 모임이다.
1919년의 3ㆍ1혁명은 많은 여성들에게 민족과 여권의식을 동시에 자각시켰다. 천도교와 기독교 신도들이 앞장서고, 일반 여성들도 함께 나섰다. 여성들은 전국에서 장바구니 대신 태극기를 들고 장터에서 자주독립 만세를 불렀다. 3ㆍ1혁명의 ‘세례’를 받은 여성들은 종파ㆍ신분ㆍ지역을 가리지 않고 민족의식을 갖게 되고, 상당수가 조국 해방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3ㆍ1혁명기 국내외에서 수많은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여기서는 3ㆍ1혁명 직전인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김인종ㆍ김숙경ㆍ김옥경ㆍ김숙원ㆍ최영자ㆍ박봉희ㆍ이정숙 등 8인의 여성이 서명한 ‘대한독립여자선언’에 관해 알아본다.
본문 33행 총 1291자로 된 순한글의 이 선언서는 “유정(有情)한 남자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들은 그 중에 기와(起臥)하면서 무지몽매하고 신체가 허약한 여자의 일단(一團)이나,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이 없이, 살아서는 독립기 아래서 활기 있는 새 국민이 되고, 죽어서는 구천하에서 수많은 선철(先哲)을 찾아가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 가는 의무이므로, 동포여 빨리 분기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3ㆍ1혁명 참여를 계기로 사회의식이 크게 고양된 전국의 여성들은 1919년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주요 여성단체의 결성을 보면 혈성단애국부인회(1919), 대한애국부인회(1919), 조선여자교육협회(1920), 경성여자청년회(1920), 기독교여자전도회(1921), 조선여자청년회(1922) 등을 꼽을 수 있다. 여성단체들은 야학운동과 계몽강연회 등을 통하여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으로 이끌었다. 
때마침 민족주의운동계열과 사회주의운동계열이 1927년 2월 대동단결을 다짐하면서 신간회를 창립한 것이 여성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성들은 동년 1월 직업여성 친목단체로 활동하던 망월구락부가 창립 1주년 행사에서 “사교기관의 운동을 벗어나 의의 있는 활동”을 하기로 뜻을 모으고, 비슷한 시기에 재경 동경여자 유학생친목회가 조직되면서 여성단일당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몇 갈래로 추진되던 여성단체들은 1927년 4월 26일 서울에서 근우회(槿友會) 창립을 위해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발기인은 강정순ㆍ주세죽ㆍ허정숙ㆍ황신덕ㆍ차미리사ㆍ김활란ㆍ김은도ㆍ김일엽ㆍ김순복ㆍ유각경ㆍ길정희ㆍ정칠성ㆍ조원숙ㆍ최은희 등이다. 사회운동가ㆍ여의사ㆍ교원ㆍ기자ㆍ종교인ㆍ문인ㆍ실업인 등 각계에서 활동한 15명을 발기인으로 선정하고 5월 27일 서울 YMCA 강당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이날 채택한 근우회 취지문에서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라고 외쳤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근우회는 크게 확장되어 1929년 5월 현재 총 40여 개 지회가 결성되고, 회원은 2971명, 직업별 구성을 보낸 가정부인 1256명, 직업여성 339명, 학생 194명, 미혼여성 181명, 노동여성 131명, 농촌여성 34명이었다. 
근우회는 지회가 늘어나고 조직이 확대되면서 사회활동을 강화하였다. 서울지회가 채택한  9개조의 행동강령에서 활동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
1)남녀의 정치적ㆍ사회적 절대 평등  2)결혼의 자유, 직업의 자유  3)인신매매의 철폐  4)여자 교육의 확장, 현 교육 제도의 개선, 문맹 퇴치  5)모성 보호  6)무료 탁아소 및 육아소 설치  7)여공의 보호, 노동 조건 및 공장 시설의 개선  8)농촌 부인을 보호하는 제종 시설(諸種施設) 9)집회ㆍ결사ㆍ언론ㆍ출판의 자유.
근우회는 1920년대 독립운동의 침체기에 더욱이 여성차별의 봉건적 유제가 여전한 시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운동이었지만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여성계몽운동, 여성차별철폐운동, 독립사상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독서회ㆍ토론회ㆍ강연회 등을 자주 열었다. 
근우회는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1월 15일 서울시내 10여 개 여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도록 그 계획과 실행을 지도하였다. 근우회는 동반 단체인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1931년 5월 15일 내부의 해소론자들에 의해 해소론이 제기되고 이 해 말 본부와 지회가 모두 해체되었다. 신간회의 해소 배경과 유사한 과정이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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