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안장된 홍범도장군 진혼곡

고국에 안장된 홍범도장군 진혼곡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08.19 10:04
  • 수정 2021.09.2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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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의장대가 홍범도 장군의 영정과 유해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18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의장대가 홍범도 장군의 영정과 유해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선후기와 근현대사 인물 중에 남북한에서 함께 존경받는 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정약용, 전봉준, 안중근, 신채호ㆍ주시경 그리고 홍범도장군이다. 반봉건ㆍ개혁ㆍ반외세에 앞장섰던 주체적 인물들이다.
분단 70여 년이 지나면서 남북 사이에는 역사관이 달라지고,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소개한 분들은 남북에서 공히 좋아하고 존경받는 인물이다. 해서 ‘민족의 사표’ 또는 ‘통일조국의 사표’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향후 통일운동의 방향은 동질성은 확대하고 차이점은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홍범도장군이 서거 7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유해는 이제까지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망각과 메아리조차 없는 망향가 속에 묻혀 있었다. 일제가 가장 겁냈던 의병대장, 국권상실기 3대첩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부하들과 주민들이 가장 아끼고 따르던 대한의용군사령관, 비록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거친 정통무관출신이 아닌 산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지만, 누구보다 우수한 지략과 민첩한 전술로 일제와 싸웠던 빨치산 대장은 일제강점 기간의 두 배가 지난 세월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독립군’이었다.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장군은 일본군이 “날으는 장군(飛將軍)”이라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날렸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서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장군”이라는 ‘전설’이 나돌만큼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통감부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거부하면서 최초로 산포수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일제의 야만적인 고문으로 부인을 잃었고, 장남은 전사하였다. 둘째 아들도 종군 중에 사망했다. 조국 독립은 무장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독립군의 모체인 포수단을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 전 과정을 통해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독립운동가가 홍범도장군이다. 그가 뽑은 척살의 대상은 왜적뿐만 아니었다. 민족을 배반한 일진회 회원과 친일파도 가차없이 처단하여 민족의 의기를 살리고자 하였다.
남북에서 ‘통일조국의 사표’로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홍범도장군은 치열한 항일투쟁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남쪽(대한민국)에서 소흘히 취급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따른다. 우선 독립운동연구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고, 남한에 그를 기릴만한 후손이 없으며, 불행하게도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 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가서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서거하였기 때문이다.
구소련이 붕괴되는 1980년대 말까지 카자흐스탄은 ‘죽의 장막’에 가려지고, 홍범도의 소식도 차단되었다. 또한 그가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할 때 활동 영역이 중국의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이고, 이르쿠츠크 등에서 러시아측과 협력하여 항일전을 벌인 일, 한때 레닌과 만나서 권총을 선물로 받고 볼셰비키에 입당한 일 등을 이유로 하여 단세포적인 역사학자들로부터 ‘좌파 독립운동가’로 몰리게 되었다.
또한 “저명한 조선 빨치산대장”이라는 칭호에 따른 기피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당원이나 동지, 당파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parti’가 어원인 빨치산(partisan)은 비정규직 유격대를 칭하는 용어로, 군사적으로는 비정규전에 종사하는 게릴라와 비슷한 개념이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해삼위에서 주로 빨치산 투쟁으로 일제와 싸웠던 분들이 적지 않았다. 홍범도는 빨치산의 주역이었다.
해방 뒤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계열의 빨치산 활동으로 ‘빨치산’이란 호칭 자체가 터부시되고, 금기어로 착종되었다. ‘연상효과’는 항일전의 빨치산 대장 홍범도장군에게까지 들씌워졌다. 이 같은 연유와 배경은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그의 공적이 상당 부분 묻히거나, 다른 독립운동가에게 전공을 빼앗기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자신도 머슴이었지만 아버지도 머슴이었다. 국가로부터 혜택은커녕 태생과 성장 과정에서 온갖 핍박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누대를 두고 특권을 누려온 자들이 거침없이 조국을 배신할 때 그는 누구의 지시나 부름도 없이 스스로 의병에 나섰다.
홍 장군은 간도와 극동러시아의 춥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빨치산 대장으로서 일본군을 토멸하고,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국치 이래 최초로 국내진공작전을 펴서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는 그의 주도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3대첩’ 중의 2대첩이 홍범도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전투였다.
일제강점기에 봉오동ㆍ청산리ㆍ대전자령대첩 등 무장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몹시 빈약했을 것이고,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패기와 의기는 그만큼 취약하게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3대첩이 있었기에 부끄러운 식민지시대를 씻을 수 있었고, 당당한 민족의 상무정신을 이으면서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ㆍ민족적 결기를 갖게 되었다. 3대첩은 그만큼 민족사에 큰 의미를 주고 있다.
1919년 8월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함남 삼수갑산, 함북 회산진 등지에 출동하여 일본군을 습격하고, 10월에는 만포진 지역으로 출격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홍범도의 독립군은 1920년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의독립군과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의 독립군과 합동하여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연합사령부를 조직하고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에 본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항일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6월 4일 새벽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 건너 강양동으로 진격하여 일제 헌병주재소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 본부에서는 보병 제19사단 남양수비대장에게 명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의 본거지인 삼둔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고 이에 대비하여 6월 6일 유리한 산악 지형으로 적을 유인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제19사단 병력 60여 명이 사살되고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에 일본군은 다시 제19사단 소속의 야스가와 소좌 지휘하의 1개 대대병력으로 신미부대를 지원토록 명하였다. 하지만 이 부대 역시 고려령 서남방지역에서 우리 독립군의 기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고 삼둔자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봉오동으로 귀환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와 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일대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일본군 제19사단의 야스가와 대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 골짜기 입구까지 제발로 들어왔다. 봉오동은 사방이 험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형태의 천연 요새이다. 이곳은 하ㆍ중ㆍ상동의 3개 마을이 25리의 골짜기에 걸쳐 30~60호의 조선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한인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사령관 최진동과 연대장 홍범도는 일본군 1개 대대가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하여 봉오동에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자 이를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이때를 기다렸던 홍범도가 일제공격의 명령으로 신호총을 쏘았다. 이를 신호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동서남북의 4방에서 정확히 조준하고 있다가 맹렬한 집중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히 추풍낙엽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부는 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사망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참패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뿐 경미한 것이 전부였다. 그가 지휘한 독립군은 ‘청산리전쟁’에서도 대승리를 쟁취하였다.
나는 장군 서거 70주년인 2013년 10월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주최한 홍범도장군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마침 펴낸 졸저 ‘홍범도평전’을 국내선으로 90분 거리인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의 빛바랜 초라한 묘소를 찾아 봉정하였다. 그때 장군의 유해가 언제쯤 고국으로 봉환될까 발길이 무거웠는데, 문재인정부의 노력으로 이제야 환국이 이루어졌다. 남다른 감회를 느끼면서, 왜 하필 일본군장교 출신 백선엽 등이 묻힌 대전현충원일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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