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슬픔을 증명하라는 사람들

[기자수첩] 슬픔을 증명하라는 사람들

  • 기자명 우봉철 기자
  • 입력 2021.06.17 09:00
  • 수정 2021.07.1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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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1년 8개월여 간 췌장암과 싸워왔으나, 끝내 영면에 들었다.

이 같은 비보에 축구계는 물론, 각계각층에서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황선홍 전 대전하나시티즌 감독, 이천수 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 등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함께 만든 동료들이 빈소를 찾았고, 팬들은 그를 기리는 추모 글을 SNS에 게재했다.

그런데 모두가 슬픔에 잠겨있던 순간, 박지성 전북 어드바이저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한·일 월드컵 멤버로 고인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빈 박 어드바이저가 빈소를 찾지 않았다는 이유다. 온갖 억측으로 버무려진 글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범람했다. 이들은 ‘월드컵도 같이 뛰었는데, 조문 가는 게 어렵냐’, ‘근조 화환은 보냈냐’, ‘왜 SNS에 추모글을 올리지 않느냐’ 등의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박지성은 영국에 체류 중이어서 현실적으로 유상철 전 감독의 빈소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입국해도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2주간 자가격리를 거침으로 조문이 불가능하다. 본인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비속 또는 형제·자매 장례식 참석 외 자가격리는 면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난을 위한 비난을 쏟아낸 이들에게 박지성의 영국체류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맥락 없이 물어뜯기에 급급했다. 도 넘은 행동은 박지성을 넘어 부인 김민지 전 아나운서까지 겨냥했다. 김 전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는 악성 댓글이 이어졌다. 기사를 통해 조의를 표하라거나, 근조 화환을 촬영해 인증하라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김 전 아나운서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개인의 영역을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보고해야 할 이유가 나에게나 남편에게 도무지 없다”라면서 “그러한 ‘OOO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돌림노래 역시 그저 대상을 바꾸어 반복되는 폭력이라는 것을 안다. 때문에 장단을 맞출 마음이 들지 않는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김 전 아나운서의 말처럼 유명인이라고 해서 개인의 영역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보고할 이유는 없다. 자신의 슬픔을 증명하고자 SNS에 추모 글을 올리고, 사진을 찍어 인증할 이유가 더더욱 없다. 슬픔의 정도를 왜 대중에 증명해야 하는가.

저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 누구는 추모 글을 올려 고인과 추억을 기억하고 싶고 누군가는 조용히 보내주고 싶기도 하다.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박지성을 비난하는 자들은 지난 2016년 이천수위원장의 한 매체와 인터뷰를 소환하기도 했다. “월드컵 멤버들이 매년 모여 담소를 나누는데, 박지성과 차두리는 한 번도 참석을 안 했다”라는 대목을 따졌다. 또 고인이 투병 중 촬영한 다큐멘터리에 동료들의 응원 메시지에 등장하지 않는 점도 거론했다.

추모의 본질보다 자신들의 비난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 찾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고인에 대한 정중하고 진중한 추모 분위기보다 안타까운 영면을 이용한 마녀사냥을 일삼는 사람들을 진정한 ‘축구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세상에는 우리 눈에 비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미디어와 SNS 속의 뉴스와 소식이 지금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봉철 기자 wbcmail@dailysports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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