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41년 전 오늘 17년간의 민주화 대장정 시작되다

<김성의 관풍(觀風)> 41년 전 오늘 17년간의 민주화 대장정 시작되다

  • 기자명 김성 소장
  • 입력 2021.05.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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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26일 밤 10시.

전남도청 안에는 약 300여명의 시민들이 남아있었다. 윤상원 대변인은 그들을 모두 집합시켜놓고 이날의 상황을 설명한 뒤 비장한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굳은 각오가 아니면 지금 상황을 헤쳐나가기 어렵습니다.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직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나이 어린 투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약 150여 명만이 도청에 남았다. 이 중 100여 명은 YMCA로 가서 장교 출신으로부터 급히 총쏘는 법을 배웠다. 자정이 되었을 때 50여명은 눈을 붙이기로 하고 나머지 50여명은 도청으로 들어갔다.

3개 공수여단 특공대 379명, 일반 군복 입고 광주로 침투

27일 새벽 2시.

외신기자 테리 앤더슨(AP기자)은 새벽 2시 군인들이 2시간 안에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해 온 것을 알았다. 하여 특파원들도 도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고 도청 뒤편에 위치한 국제여관의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기로 했다.

같은 시간,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전에 차출된 3·7·11공수여단 특공대원 379명이 광주를 향해 은밀히 접근하고 있었다. 정규군 군복으로 위장한 뒤 시민수습대책위원회 본부가 있던 전남도청은 3여단 특공대가, 100미터 떨어진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은 11여단이 점령을 맡았다. 주답마을에서 무등산을 넘어온 계엄군은 2시께 조선대학교 뒷산에 도착했다. 작전개시 시간은 새벽 4시. 6시까지 작전을 마무리하고 정규부대에 목표를 넘겨주기로 했다.

적막한 밤에 총소리와 여성 가두방송, 계엄군·시민군 모두 두려움 느껴

새벽 3시.

YMCA에서 잠들었던 시민군들은 “계엄군이 오고 있다”고 외치는 소리에 잠을 깨 도청으로 헐레벌떡 들어갔다. 외곽의 시민군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도청 앞 경비대 초소에서 M1, 카빈총과 총알 10여발을 지급받았다. 계엄군의 장갑차·탱크·트럭들이 먼 거리에서 굉음을 내면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 시민군들은 인솔자를 따라 YWCA로 갔다. 외곽에서는 벌써 총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두려웠다. 사방이 적막한 밤중에 총소리는 들려오고, 어디에선가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여러분”하는 여인의 스피커 음성이 두려움으로 몰고 갔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선대를 출발하여 도청방향으로 가던 3공수 특공대는 방송차량이 지나가자 4차선 도로를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건너갔다. 11공수가 조선대 운동장을 지나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을 때 등 뒤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특공대원들이 가는 곳을 미리 알고 죽음의 축원을 띄우는 멜로디 같았기 때문이다. 달빛을 통해 보니까(음력 18일) 대원들도 걸음을 멈추고 주저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멀리서(광주공원 근방) 소총 소리가 계속 울려 퍼져 왔다. 그때 시간이 새벽 3시 전후였다. 11공수는 도로와 하천을 지나 3시 55분 목표지점인 전일빌딩에 도착했다.

4시 정각, 목표건물 공격 개시 … 헬기도 공중사격으로 탄흔 남겨

오전 4시.

3공수는 전남도청 뒤쪽에 도착하자마자 지체없이 뒷담을 넘었다. 유리창을 깨고 건물로 들어갔다. 시민군 대부분은 도청 청사 2층과 3층 복도에서 전면에 있는 금남로를 지켜 보고 있었으나 그런데 계엄군은 건물 뒤편으로부터 쳐들어왔다. 전투가 시작되자 시민군들도 응사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몇 발 안되는 실탄과 M1, 칼빈소총은 계엄군 M16소총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계엄군이 2층에 올라갔을 때 시민군 6~7명이 복도의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향해서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휘자가 공포 몇 발을 쏘자 급히 사무실로 피하고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계엄군이 무기를 복도 쪽으로 버리고 기어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사살하겠다고 하자 몇몇은 명령에 따라 항복했다. 그러나 대변인 윤상원은 총을 겨눈 채 복도 쪽으로 나오는 순간 복부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계엄군은 집중 사격을 하거나 섬광탄을 방에 던져넣은 뒤 시민군들이 잠깐 정신을 잃은 틈을 타 진입하여 “항복하라”고 외쳤다. 계엄군이 들어간 방에는 3~6명 정도가 있었으며, 항복한 사람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계엄군들이 도청 2층에 체포한 사람을 집결시켜 놓자, 소속을 알 수 없는 머리가 긴 사복들이 와서 체포된 사람들의 등에 가담 등급을 표시했다. 후문을 지키고 있던 시민군 2명 중 한 명은 헬기로부터 사격을 받고 나중에 숨졌다. 헬기는 조립식 건물에 군인들을 내려주고 있었다.

건물을 수색하던 계엄군은 도청과 인접한 바깥 건물에서 외국기자가 촬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AP통신 테리 앤더슨 기자도 동시에 여관 옥상에서 겨우 15미터 정도 떨어진 도청 건물에 계엄군 두 명이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들은 기자를 향해 M16을 갈겨댔다. 3공수 특공조장은 도청 점거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무장헬기의 위력시위를 요청했다. 결국 3공수는 4시 55분 도청을 점거했다.

11공수는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동시에 공격했다. 이에 앞서 관광호텔 6층 VIP룸에 숨어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피던 호텔 영업과장은 관광호텔보다 높은 상공에서 대형화기에서 발사된 총탄이 유성과 같이 빨간 빛을 내면서 맞은편 전일빌딩 10층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을 펴면서 가장 걱정했던 점은 도청주변에서 가장 높은 전일빌딩 옥상에 시민군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격하는 거였다. 하여 전일빌딩 옥상의 기관총을 제거하지 않고는 특공대를 투입할 수 없었다. 뒤늦게나마 전일빌딩 10층을 중심으로 실내외에 박힌 245발의 탄흔이 발견됨으로써 헬기 사격을 입증했다. 비슷한 시각, 서동에 살던 주민은 자신의 집 2층 다락에서 헬기 1대가 적십자병원 근처 도로에 병력 몇 명을 내려놓고 도청쪽으로 이동하면서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 한 목사는 헬기 1대가 도청쪽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학동의 교회 첨탑에서 목격하였다.

전일빌딩에 진입한 계엄군은 각 층을 수색하였으나 옥상에는 기관총이 없었고 시민군도 모두 철수하여 총격전 없이 쉽게 건물을 장악할 수 있었다. 11공수도 결국 5시 1분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접수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전일빌딩 바로 뒤편에 있던 YWCA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계엄군의 사전 첩보에는 없었던 내용이었다. YWCA에 있던 시민군들은 도청에서 요란한 총격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쪽으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 의아해 했다. 그래 ‘우리는 언제 오려나’하고 궁금해하던 순간 계엄군이 거리에 나타났다. YWCA에서 도청을 향해 시민군이 총격을 가하자 11공수 3개 특공조는 건물의 전면과 후면에서 집중사격을 실시하며 1층부터 수색에 나섰다. 결국 6시 20분 3명의 시민군이 숨지고 29명이 포로로 잡혔다.

라디오, 계엄군의 진입 알리면서 “폭도들은 자수하라” 방송

오전 5시.

이미 날이 밝았다. KBS 라디오는 계엄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고 투항을 권유하는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돌아온 병사’와 ‘콰이강의 다리’ 행진곡도 들려줬다. 5시 13분쯤 총소리가 거의 멈췄다.(계엄사령부는 이 시간에 작전을 종료했다고 발표) 오전 3시께 광주시 외곽에서 전차 10대와 장갑차 5대를 앞세우고 출발한 20사단 병력이 지축을 흔들며 속속 금남로에 나타났다. 공중에서는 UH-1H 4대. AH-IJ(일명 코브라) 2대. 500MD 5대 등 11대가 일렬종대로 광주시내를 돌며 위력시위를 벌였다. 폭도들에게 자수하라는 방송도 했다. (군은 1987년 기록을 조작하면서 5시부터와, 6시부터 각각 2차에 걸쳐 광주상공에서 위력시위를 벌였다고 했을뿐 사격은 없앴다)

공수부대 자취 감추고 20사단 정규군이 시체처리와 포로 연행 맡아

오전 7시

광주 외곽 31사단 주변 여관으로 숙소를 옮겼던 국제신문 김양우 기자팀은 27일 새벽 밤새도록 조명탄이 터지고 헬리콥터가 뜨고 탱크와 장갑차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그러다 새벽 5시쯤 돼서야 잠잠해졌다. 급히 일어나 전남도청까지 7~8킬로미터 거리를 걸어갔다. 특공대로 작전을 폈던 공수대원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20사단 정규군이 도청에 널려진 시체를 치우고 체포한 시민군을 굴비처럼 엮어서 버스에 태우는 걸 목격했다. 또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헌병차에 실려 연행되는 것을 보고 별 2개 장군에게 그 이유가 뭐냐고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한국일보 조성호 기자는 어제까지 시민군 ‘출입비표’를 내보이고 드나들었던 도청에 오늘은 계엄군이 내준 ‘보도’ 완장을 차고 들어가게 되자 자신의 신세에 한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중앙일보 장재열 기자는 28일 총탄세례로 곰보가 된 YWCA 건물을 찾았다. 2층에 올라가 보니 소파에 피가 흥건했고 시민군이 엄폐물로 이용한 철제 캐비닛에 총알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바닥에는 사체를 끌고 간 듯 검붉은 핏자국이 길게 끌려 있었다. 장기자는 취재수첩에 “이 피는 28일 하오 12시 50분까지 굳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고여 있는 피가 이틀이 지나도 굳지 않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브레들리 마틴 기자(미국 볼티모어 선 특파원)는 냉철하면서도 국제정세를 폭넓게 분석하고 있었던 대변인 윤상원이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의 행동을 분석했다. 형편없는 인원과 무기들을 가지고 그가 무모하게 무장항쟁계획을 세웠던 건 비록 도청 사수에 실패할망정 국민들이 1980년대에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 군사정부를 뒤엎어 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윤상원 나름의 ‘고립지역 사수’ 전략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결국 이날부터 17년간 온 국민의 투쟁 끝에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니 윤상원의 꿈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날 작전이 종료된 뒤 계엄사령부는 폭도사살 17명. 폭도생포 295명. 계엄군 전사 2명. 부상 11명이었다고 발표했다. 작전투입 병력은 3·7·11공수특전여단과 20·31사단, 3개 병과학교(보병·포병·기갑학교) 등 총 8개 부대 7,286명이었다. 이상의 내용은 법원의 판결문(1997년), 《5·18특파원리포트》(1997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2018년) 등을 종합해서 정리한 글이다.

10일간의 항쟁은 막내렸으나, 이어 시작된 17년간의 ‘전국시위’로 민주화 완성

결국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제 1차 민중항쟁은 27일 10일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날 오전 전주 신흥고생 1,400명이 교내 시위에 나섰고, 목포에서도 1만명이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번에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제 2차 민주화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97년 5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면서 17년만에 민주화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27일 도청에서 목숨을 던졌던 윤상원의 꿈이 끝내 이루어졌다.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12·12로 정권을 장악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정치군인들은 ‘반란’이란 멍에가 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1980년 ‘서울의 봄’ 기간동안에 구속과 언론 검열을 일삼다가 급기야는 계엄령 전국확대, 광주에 3개 공수여단 투입이라는 악수를 두어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1997년 4월 대법원의 역사적 판결로 ‘반란군부’가 되었다. 하지만 무기징역 판결 8개월만에 사면까지 받아 석방된 전두환은 반성은커녕 4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5·18항쟁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발포 명령자, 헬기사격, 광주시민 암매장 사건 등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군부’라는 단어는 아직도 ‘반란군부’로 바뀌지 않고 있다. ‘북한군 600명 침투설’을 비롯한 온갖 가짜뉴스를 유포했던 사람들과 특정언론은 국민에게 석고대죄하지 않고 ‘보수’의 장막 뒤에 숨어 눈치를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5·18논의를 마무리할 경우는 광주시민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을 함께 싸잡아 역사에 ‘양비론’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제는 법률적 단죄를 받고도 과오를 덮어둔 채 여전히 호의호식하고 있는 반란군부 지휘관들의 죄상을 고발하는 일이 필요하다. 1995년 검찰 조사과정에서 털어놓은 특공대 초급장교의 진술은 명령에 따랐던 장병들의 억울함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도청진압과정 이후 선두에서 목숨을 걸고 활동했던 중대장들은 표창장 하나 받았고, 그 위 대대장·여단장·사령관들은 훈장을 받았습니다. 훈장을 준 이유가 그들이 광주사태에서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이라면 지금에 와서 책임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과 않는 전두환과 은폐 주모자들 처단 위해 장병들의 ‘진실고백’ 필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편의대 운용에서부터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벌였던 모든 범죄행위를 밝혀냈을 때 참여 장병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민주주의 기반도 튼튼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또다른 형태의 반란이나 유언비어를 획책할 수 있다. 명령에 따르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히는 장병들이 또 생겨날 수 있다. 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공기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참여 군인들의 ‘진실고백’이라는 ‘제 3의 민주화운동’이 필요하다. 오늘이 41년 전 광주가 함락됐던 ‘그날’이기에 더욱 시대적 책임감을 느낀다.

김성(지역활성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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