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 박노해, ‘밤나무 아래서’

[시와 풍경] 박노해, ‘밤나무 아래서’

  • 기자명 박상건 교수
  • 입력 2020.10.16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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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시간 속에서 밤은 익어가고

이럴 때가 있다

일도 안 풀리고 작품도 안 되고

울적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을 때

툭, 머리통에 꿀밤 한 대

아프다 나도 한 성질 있다

언제까지 내가 동네북이냐

밤나무를 발로 퍽 찼더니

후두두둑 수백 개의 밤톨에 몰매를 맞았다

울상으로 밤나무를 올려봤더니

쩍 벌어진 털복숭이들이 하하하 웃고 있다

나도 피식 하하하 따라 웃어 버렸다

매 값으로 토실한 알밤을 주머니 가득 담으며

고맙다 애썼다 장하다

나는 네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살아나온 그 마음을 안다

시퍼런 침묵의 시간 속에 해와 달을 품고

어떻게 살아오고 무엇으로 익어온 줄 안다

이 외진 산비탈에서 최선을 다해온 네 마음을

- 박노해, ‘밤나무 아래서’ 전문

박노해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 수록된 시다. “울적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을 때” 성질나서 밤나무를 찼는데 “후두두둑 수백 개의 밤톨”이 머리로 쏟아졌다. 시상 전개를 위한 설정일 수 있지만, 우리는 무심코 걷어찬 돌멩이로 인해 누군가, 그 무엇에게는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기도 하며 타산지석의 지혜를 깨닫곤 한다.

시인은 “밤나무를 올려봤더니/쩍 벌어진 털복숭이들이 하하하 웃고 있다”. 화해와 깨달음의 순간이다. “하하하 따라 웃”던 시인은 주머니에 알밤을 담으면서 “고맙다 애썼다 장하다”, “네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살아나온 그 마음을 안다”면서 중의적 화법으로 삶을 반추한다.

돌이켜보면 “시퍼런 침묵의 시간 속에 해와 달을 품고” 살아온 나날이었다. 밤이 알알이 익어가기까지 “어떻게 살아오고 무엇으로 익어온 줄 안다”, “외진 산비탈에서 최선을 다해온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 그렇게 시인은 자본주의와 경쟁지상주의 세상에서 정의로운 길을 택해 걸어온 뒤안길을 되돌아본다.

두물머리 밤나무
두물머리 밤나무

박노해 시인은 195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노동・생태・평화운동가로 살아왔다. 노동자 생활을 하며 선린상고 야간을 다녔다.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출간되자 군사정권은 금서로 지정했다. 그럼에도 시집은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결성으로 7년여 수배생활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출간했다. 1997년에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했고 석방 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됐지만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면서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시퍼런 침묵의 세월 동안 나눔문화 운동과 이라크 전쟁터에서 아프리카, 중동지역 아이들의 가난과 분쟁 문제를 해결하는 평화활동을 펼쳤다. 2010년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시집, 2014년 ‘다른 길’이라는 사진에세이집을 선보이기도 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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