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시대와 나란히, 시민과 나란히’…‘원순씨’를 보내며

<김주언 칼럼> ‘시대와 나란히, 시민과 나란히’…‘원순씨’를 보내며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20.07.1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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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저녁식사 기회가 있었다. 지인 몇 사람과 환담을 나눈 자리였다. 많은 얘기가 오갔지만, 유독 학창시절의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풀어가던 목소리가  기억에 생생하다. ‘흙수저’로 간난의 세월을 살아온 그가 변호사와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을 거쳐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르기까지의 역정이 다시금 반추된다. 실종에 이은 사망 소식은 황망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에게 극단적 선택을 강요했을까. 외부에서 바라본 그의 삶은 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욱 의구심을 자아냈다.
고 박시장과의 인연은 엄혹했던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10시민항쟁 직전이었던 1986년 보도지침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였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선뜻 무료변론에 나섰다.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해 홍성우 조영래 황인철 등 내로라하는 많은 선배 변호사들에 이은 막내로 궂은 일을 도맡았다. 그는 1995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을 때까지 9년동안 피고인들과 함께했다. 수임료를 전혀 받지 않는 무료변론인데도 헌신적으로 피고인들을 위해 변론에 나선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고 박시장과의 인연은 간헐적으로 지속됐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일하면서 참여연대를 창립해 시민운동가로 나섰다. 참여연대는 한국에 시민사회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98년 출범한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과 언론단체, 노동단체가 연대한 시민운동단체였다. 사무총장을 맡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고 있던 그와 함께 활동할 기회를 얻었다. 그가 서울시장이 된 뒤에는 여러 차례 각종 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보도지침 사건 변호를 맡았던 인연이 끈질기게 이어진 셈이다.
고 박원순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촌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2002년 펴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에 미리 쓴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많은 분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 내 형제들을 잊을 수는 없겠습니다. 어린 시절 내 학비를 보태고 부모님을 돌보던 큰 누님과 매형, 아들만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외지에서 무진 고생만 한 둘째누님, 셋째누님,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집갈 때까지 온몸을 바쳐 일한 넷째누님, 학문의 길을 걷느라 어려우신 걸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형님, 그리고 오빠들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내내 농사일만 하던 막내 여동생.”
고 박시장은 어렵사리 서울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서울대는 캠퍼스를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 막 문을 연 시점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선포한 뒤 학생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1975년 서울대 농대생이었던 고 김상진 열사가 유신반대를 외치며 할복했다. 학생들은 관악 캠퍼스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이른바 ‘5.22 사태’이다. 경찰은 캠퍼스에 난입해 도서관까지 수색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1학년이던 그도 경찰에 잡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명당했다.
그는 학교를 옮겨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국제법을 수학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구지검에서 초임검사로 일하다가 사형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후 변호사로 전업했다. 전두환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던 학생들이 무더기로 감옥에 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의 변호사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수임료를 한푼도 받지 않는 무료변론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로서의 고단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보도지침 사건,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대표적 사례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1986년 6월5일 경찰관 문귀동이 학생운동가 권인숙(현 민주당 국회의원)을 성폭행한 사건이다. 그는 변호인단으로 2년여의 재판 끝에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운동권 학생은 성을 혁명도구화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두환정권은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이 이를 그대로 대서특필하도록 강요했다.
고 박시장은 한국 현대사에도 관심이 깊었다. 여러 경로를 거쳐 현대사 자료를 모았다. 그가 수집한 해방전후사 사료들을 기초로 80년대 초중반 서중석교수 고 이이화 선생 등과 함께 해방3년사 세미나를 열었다. 이를 토대로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가 출범했다. 그는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연구소 사옥을 구입했다. 서울시장 관저에는 그가 모은 장서와 자료가 가득했다. 그는 재판과정을 통해 체득한 연구를 바탕으로 저서 ‘국가보안법 연구’를 펴냈다. 이어 3권으로 구성된 ‘야만시대의 기록’은 한국 현대사를 집대성한 저작물이다. 
그는 1995년부터 시민운동가로 나섰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필두로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부패정치인의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설립했다. 기부받은 물건을 가공해 저소득층에게 저렴하게 팔고 수익을 기부하면서 기부문화 확산을 주도했다. 그가 설립한 희망제작소는 생활주변의 소소한 불편과 부당함을 개선하는 생활정치를 표방했다. 서울시장으로 선출된 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시정을 펼친 것도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서울시장 시절 ‘시대와 나란히, 시민과 나란히’를 구호로 내세웠다. 최장수 3선 서울시장으로 불통 행정을 소통과 협치로 바꿨다. 또한 ‘한강르네상스’로 대표되는 토건중심에서 복지중심으로 바꾸었다. 친환경 무상급식을 필두로 서울시립대 반값등록금을 단행했다. 뉴타운사업은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틀었다. 갈등을 빚던 서울시의회와 시민사회를 파트너로 끌어들여 협치를 시도했다. 찾아가는 주민센터, 서울형 유급병가, 전국민 고용보험, 미세먼지 시즌제, 비정규직 정규직화, 공공자전거 따릉이 등 ‘시민이 피부로 체감하는 서울의 변화’를 이끌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여성인권 운동가이기도 했다. 대표적 사건이 1992년 신교수 성희롱 사건이다. 서울대 화학과 신정휴 교수가 우조교에게 오랫동안 신체접촉을 강요했다. 조교가 거부하자 신교수는 조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겼다. 한국 최초로 성희롱소송이 제기됐다. 그는 우조교의 변론을 맡아 6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승소했다. ‘성희롱’이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이 과정에서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현 양성평등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성희롱 개념이 법제화했다.
그랬던 그도 직장내 성희롱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은 역설이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택한 이유는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 하루전 전 비서로부터 성추행으로 피소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과관계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피소사실 자체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것이라는 도덕적 의무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 등 도덕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던 진보정치인의 극단적 선택과 궤를 같이 한다. 고 박원순 시장의 공과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무겁고 힘든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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